1920년 8월에 동아시아를 들썩인 이벤트가 있다. 7월에 미국을 출발한 동양시찰단이 필리핀·중국·한국·일본을 순방하는 행사였다. 상·하원 의원 42명과 가족들로 구성된 시찰단에 대한 동아시아인들의 관심은 일본의 반응에서도 느껴진다.
조선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는 그해 8월 8일 자에서 "미국 의원단 일행은 오난 19일 봉텬·경셩을 것쳐셔 하관(下關)에 도챡"한다고 보도했다. 기사는 만주 펑텐과 서울을 거쳐 시모노세키로 향하는 미 의원들을 영접하기 위해 일본 국회의 귀족원·중의원 서기관들이 펑톈까지 마중을 나가고 귀·중 양원 의원들이 서울까지 나간다고 썼다.
제1차 세계대전(1914~1918) 막판인 1917년에 참전해 독일의 패전을 이끌어낸 미국은 1920년 1월에 창립된 국제연맹에 참여하지는 않았지만 연맹 창립에 결정적 기여를 했다. 이런 미국의 정치인들이 대규모로 순방하게 됐으니 동아시아가 들썩이지 않을 수 없었다.
그해 8월 25일 자 <동아일보>는 미국 의원단이 펑텐에서 "미국은 극동에 대하여 일점의 영토적 야심을 포(抱)치 아니하고 오즉 정의와 인도를 위하여 아세아의 인문진보 외(外) 상공업·교육·위생 기타 정치·경제에 긍(亘)하야 그 촉진·발전에 대한 원조를 불석(不惜)하노니"라고 발언한 사실을 보도했다.
박정희 형인 박상희를 포함한 한국 독립운동가들은 해방 이듬해부터 대구 10월항쟁 등의 방법으로 미군정과 싸웠다. 1945년 9월에 미국이 해방군이 아니라 점령군으로 한국에 들어오는 모습을 목격한 이후의 일이다.
그러나 1920년 당시만 해도 한국인들은 미국을 한없이 동경했다. 미국은 극동을 침략할 생각이 없고 이 지역 정치·경제와 관련된 원조를 아까워하지 않는다는 의원단 대표의 발언은 한국인들의 가슴을 뭉클하게 만들었다. 위 기사의 작성자는 "동양을 방문하여 오인(吾人)에게 친히 그 고상하고 순결한 이상을 전함은 실로 유쾌한 바라"라며 미국을 칭송했다.
그해에 미국 의원들의 방한을 활용해 대한독립의 당위성을 세계에 퍼트리고자 했던 독립운동가들이 많았다. 그중 하나가 김상옥 열사 등과 함께 거사를 준비한 김동순이다.
김상옥은 1923년 1월 12일 일제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투척하고 열흘 뒤 지금의 서울 종로5가역 부근에서 일본 군경 1000명 이상과 총격전을 벌이다가 스스로 순국했다. 그 김상옥이 3년 전인 서른한 살 때도 대규모 거사를 준비했고, 이때 독립운동가 김동순이 그의 곁에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