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래는 아는 동생과 전시만 보러 가려고 했다. 5월 17일이라는 날짜에 특별한 감흥은 없었고, 그저 일주일 만에 돌아온 주말일 뿐이었다. 그러다 구청에서 올라온 홍보 글을 봤다. '45주년 5.18 민주화운동 기념 민주평화대행진'이 열린다고 했다. 주민 누구나 참여할 수 있다는 안내를 보고, 이 기회를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동생에게 카톡으로 참여 의사를 물었더니, 전혀 예상치 못했다며 당혹스러운 반응을 보였다. 그 반응에 나도 결국 "그냥 가지 말자"며 마음을 접었다.
아시아문화전당으로 가는 길, 5.18 기념 행사 현수막을 보았다. 그 중 눈에 띄었던 건 "세계인권도시포럼"이었다. 사실 김대중컨벤션센터에 직접 가고 싶었는데 게으름을 못 이겨 온라인 중계로 만족해 버린 이틀 전의 내가 원망스러웠다. 그래서 오늘의 전야제만큼은 현장에서 보고 싶다는 마음이 커졌다.
여유 있게 약속장소에 도착했으나 동생이 늦을 것 같다고 연락이 왔다. 기다리는 동안 배가 고파 궁전제과에 들렀다. '5월 광주 나눔 세일'로 전 상품 10% 할인 중이었다. 빵을 들고 민주광장을 어슬렁거렸다. 옛 도청 앞에는 무대가 설치되어 있었고, 주변에는 1980년대의 모습 그대로인 버스와 택시가 있었다. 금남로 일대에는 캐노피 천막들이 길게 늘어서 있었고, 행사 준비로 분주한 모습이었다. 궁전제과에는 '6.3'이 찍힌 선거빵이 진열되어 있었다. 괜히 다른 빵을 사 먹은 게 아쉬웠다.
가장 큰 빚을 진 사람은 바로 나였다
동생을 만나 전시를 보고 기념품점에 들렀을 때, 방명록에 서울 시민이 쓴 "광주에 빚진 마음"이라는 글을 보았다. 그 문구가 십수년 전의 기억을 떠올렸다. 무전 여행 중 차를 태워주신 분이 고향을 묻더니 한숨을 쉬며 "우리나라 사람들은 광주 사람들에게 얼마나 빚졌는지 평소 고마움을 모르고 살아"라고 하셨다.
그 말에 얼마나 마음이 불편했는지 모른다. 사실, 가장 큰 빚을 진 것은 타지 사람이 아니라 5.18 이후 태어난 광주 시민들, 특히 5.18에 무심했던 나 같은 젊은이들이었음을 애써 외면하고 살아왔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다시 민주광장으로 나오니 무대에서 합창이 진행 중이었다. 동생이 지나가며 "되게 잘 하신다"고 했고, 나도 동감했다.
동생과 아쉬운 인사를 나누고 혼자 거리를 돌아다니며 다양한 부스를 구경했다. 환경, 성, 비건, 장애, 역사 등 다양한 주제의 부스들이 있었다. 그 중 굿즈 부스에서 '5월'부터 시작되는 달력이 눈에 띄었다. "그렇구나, 한 해의 첫 자리가 5월일 수도 있겠구나." 그런 생각을 하며 공짜로 받은 주먹밥을 먹으며 구경을 계속했다.
여기저기 눈을 돌리다 보니 나도 모르게 반대 방향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그러던 중 한 목소리가 내 귀를 사로잡았다. "서명 한 번만 부탁 드려요." 나는 홀리듯 "네" 하고 대답하며 서명을 받는 부스에 갔다. 제주 항공 참사의 진상 규명을 요구하는 서명 부스였다.
펜을 받아 서명을 하려고 하는데 부스에 계신 두 분이 내 얼굴에 밥풀이 묻었다고 알려주셨다. 부끄러워서 얼른 볼을 문질러봤지만, 엉뚱한 곳만 짚었나 보다. 한 분이 밥풀을 떼어 주려고 손을 뻗으셨을 때, 다행히 내가 먼저 발견했다.
감사 인사를 남기고 다른 곳으로 가니, 사람들이 모두 맨손으로 주먹밥을 먹고 있었다. 나는 유일하게 종이컵을 가로로 찢어 입을 파묻고 먹고 있었다. 그러니 얼굴에 밥풀이나 묻히고 다니지.
만들기 체험을 하고 싶었지만, "어른도 할 수 있나요?" 하고 묻기 어려워 아이들이 앉아있는 체험 부스를 지나쳤다. 그렇다고 아쉽지는 않았다. 오히려 보기 좋았다. 나만 하더라도 5.18 기념 행사에 가자고 편하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없어서 혼자 돌아다니고 있는데 아이들은 아무 부담 없이 순수하게 시민 축제를 즐기며 소중한 추억을 만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