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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반점투성이...'조선소밥' 15년이그녀에게 준 훈장
2024-05-01 12:12:51
민병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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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 여섯에 남편과 헤어지고 거제로 내려왔어요. 결혼 전 사무보조 업무를 했던 게 전부였습니다.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정말 막막했어요." - 정인숙

"남편이 하던 알루미늄 사업이 부도가 났어요.하늘이 무너지는 충격이었죠. 그런데 나쁜 일은 같이 온다고 남편때문에 가정이 깨져버렸어요." - 나윤옥

거제시에서 한화오션 조선소를 다니는 정인숙과 나윤옥은 묘하게도 둘 다 이혼의 아픔을 겪은 여성노동자다. 살림만 했던 정인숙은 기술도 경험도 돈도 없는 처지, 앞날이 캄캄했다. 아들 둘과 딸은 남편이 키우기로 했으나 그는 자기 밥술조차 만들 능력이 없었다. 이혼 후 3개월 동안 방구석만 바라보던 정인숙을 거제에 있는 오빠가 불렀다. "여기가 니 고향이고 조선소에서 노력하면 밥은 먹을 수 있다"며 '도장공'으로 밀어 넣었다. 2010년 6월 15일, 그날로 정인숙은 대우조선 도장부의 사내하청인 '한성'의 노동자가 되었다.

나윤옥은 조금 다르다. 이혼하고서 그는 인천의 핸드폰 부품공장에서 품질검사를 했는데 수입은 들쭉날쭉이었다. 한 달을 꼬박 일하면 최저임금은 받지만 일이 없는 달은 100만 원 벌기도 힘들었다. 나윤옥은 2013년 두 딸과 함께 거제에 있는 친구에게 놀러왔다가 대우조선에 마음을 뺏겼다. 이 번듯한 회사에 들어가면 월급은 꼬박꼬박 나오지 않을까 기대를 갖고 문을 두드렸다. 그를 받아준 곳은 대우의 하청업체 '거광'이라는 곳이었다.

두 사람이 거제에 내려왔을 때 "지나가는 강아지도 만 원짜리를 물고 다닌다"라는 말이 돌 정도로 조선업은 호황이었다. 장밋빛 꿈을 안고 들어간 거제대로 3370에 있는 대우조선소. 기대와 달리 하루 종일 쇠를 깎고 바닷바람에 맞서고 뜨거운 태양을 견뎌야 하는 사납고 험한 곳이었다.

거친 바닷가에 서서

정인숙은 입사해 롤러를 잡았다. 그의 말대로 도장은 배 만드는 작업의 마지막이며 꽃이다. LNG선이건 곡물운반선이건 용접으로 이어붙인 울퉁불퉁한 겉모양을 맵시 있게 꾸미는 건 도장만이 할 수 있다. 철판이 녹 쓰는 걸 막기 위해서도 도장은 꼭 필요한 작업이다. 지난 13년 동안 그의 손을 거쳐 옥포항에서 큰 바다로 나간 배가 무려 50척, 하지만 도장작업은 결코 우아하지 않다. 하루하루가 전투다.

정인숙은 출근해 작업지시를 받으면 안전모에 안전화, 안전띠를 메고 보안경과 방진마스크를 낀다. 과일박스 크기 작업통에 페인트와 롤러·붓·헤라들을 넣고 이를 움켜쥔 채 현장으로 간다. 내 몸 하나도 무거운데 10kg이 넘는 작업용구는 유격훈련 때 병사들이 메는 군장에 버금간다.

전처리를 끝내고 스프레이가 뿌려진 곳을 덧칠해 도장막을 두텁게 하는 일이 그의 업무. 정인숙의 롤러와 붓은 엔진룸이나 선체 등 안 가본 곳이 없지만 제일 어려운 곳은 역시 탱크안이다. 저장소 노릇을 하는 탱크는 종류에 따라 높이가 10층, 15층 다양하다. 이런 곳을 팔꿈치에 작업통을 낀 채 수직 사다리로 오르내려야 한다. 처음엔 어질어질했다. 자칫 헛디디면 큰 사고가 날 수 있으니 언제나 신경이 곤두선다.

탱크 안에서 도장작업을 할 때 가장 큰 문제는 환기. 배의 옆면을 칠할 때는 발판을 딛고서 위에서부터 내려온다. 바닷바람이 땀을 식혀주고 냄새도 가셔준다. 그런데 탱크 안은 도무지 답이 없다. LPG선은 카고탱크라고 탱크 안에 탱크를 집어넣어 환풍기를 틀고 공기를 빨아대도 어지간해서는 바깥 공기와 순환이 되지 않는다. 열명 안팎의 반원이 한꺼번에 작업을 시작하면 탱크 안은 금세 신나 냄새로 가득 찬다. 이때 종종 신나에 취한다. 이미 작업한 곳을 되풀이해 칠하거나 자신도 모르게 갈짓자 걸음이 되어 구석으로 파고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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