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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사망한 노벨문학상 수상자의 역작
2024-05-09 15:29:22
김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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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야자키 하야오의 <붉은 돼지>는 내가 아끼는 몇 편의 영화 중 하나다. 1차대전에 참가한 파일럿으로 국가적 전쟁영웅으로 추앙받던 마르코가 주인공인데, 어째서인지 돼지가 되어 있다. 그렇다고 축사에서 꿀꿀거리는 돼지는 아니고, 말하고 생각하는 건 사람인데 외양만 돼지가 되어 있다는 얘기다.

영화는 조국이 파시즘의 그늘로 빠져가는 가운데 마르코가 겪는 이야기를 그린다. 돼지가 되었을 만큼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반쯤은 초연하고 반쯤은 포기한, 어딘지 달관한 자세로 살아가는 마르코. 영화는 냉소적인 태도로 일상을 사는 마르코의 모습을 서글프면서도 낭만적으로 그려낸다.

극중 마르코가 옛 연인이 운영하는 바에 들어서 술을 한 잔 하는 장면이 있다. 그곳에는 옛 친구의 사진이 걸려 있는데, 마르코는 그를 가만히 보다가는 이렇게 말한다.

"좋은 놈은 모두 죽는군."

어디 좋은 놈들만 죽겠는가. 모든 죽음 가운데서도 좋은 이들의 죽음이 유독 가슴에 박히는 것이리라.운명을 주관하는 신의 멱살을 흔들면서 이 세상에 조금은 더 시간이 주어져야 했을 이가 있다고 외치고픈 때가 누구에게나 있었던 것이다.

세상을 떠난 시대의 지성을 떠올리며

역사는 과연 진보하는가. 역사가 진보한다면 시대를 살아가는 인간의 자세는 몇 가지로 나뉠 것이다. 진보하는 세상의 최전선에서 시대를 이끄는 자, 둔하게만 움직이는 세상의 중심에서 빛을 누리는 자, 나아가려는 시대의 목줄을 붙들고 어떻게든 주저앉히는 자 말이다. 진보가 인류의 나아갈 길이라면 무지한 대중을 끌어 어떻게든 한 발 더 나아가자 독려하는 피로하고 괴로운 길을 걷는 이에게 존경을 표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다. 저 유명한 빅토르 위고며 볼테르 같은 이의 죽음에 수많은 민중이 경의와 애도를 표한 것도 그 때문일 테다.

지난해 세상을 떠난 이 가운데 유독 아깝게 느껴지는 인물이 있다. 오에 겐자부로. 1994년 노벨문학상 수상작가로 널리 알려진 그는 시대의 지성이라 불러야 마땅한 삶을 살았다. 제국주의를 정면에서 맞닥뜨렸던 나쓰메 소세키의 시대가 가고, 2차대전 뒤 패전국으로서의 일본을 조명하고 미래를 도모한 일련의 작가군 가운데 가장 빛나는 인물이다. 서구에서도 널리 알려진 작가들, 이를테면 가와바타 야쓰나리, 미시마 유키오, 엔도 슈사쿠, 다니자키 준이치로 등과 차별화되는 냉정하고 비판적인 시각을 바탕으로 여러 작품을 남겼다.

특히 전후 고립을 자처하는 흔한 패전국의 자세에서 벗어나 국수주의가 아닌 평화의 주도국으로서 일본의 가능성을 타진해온 점은 오에의 특별함이라 해도 좋겠다. 민주주의며 평화를 설파하며 세계의 지성들과 활발히 소통하여 그에겐 사회운동가며 민주운동가, 평화주의자라는 평가가 따르기도 했다. 그러니만큼 오에의 죽음에 일본을 넘어 한국과 다른 여러 나라의 지성들이 슬퍼했음은 일견 당연한 일처럼 보인다.

<만엔 원년의 풋볼>은 오에의 작품을 논할 때면 가장 먼저 언급되는 작품이다. 1994년 노벨문학상 시상에서도 수상작 소개의 3분의 1이 이 작품으로 채워졌을 정도다. 내놓는 작품마다 본질적인 일관성이 있다고 평가받은 그의 소설군에서 이 작품이 그 중심에 있다고 이야기되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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