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지훈(趙芝薰,1921~1968)은 경북 영양군에서 태어나 <고풍의상>으로 <문장>지를 통해 등단하고, 박두진·박목월과 함께 '청록파'의 일원이었다. 한때 교과서에도 실린 <승무>, <봉황수> 등 명작을 쓰고,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검거되기도 했다.
27세 때 고려대학교 문과대학 전임교수로 교단에 나선 이래 시인, 국학자로서 소임을 다하였다. 독재정권을 향한 비수와 같은 시론을 비롯하여 다양한 사회활동에 나섰다.
조지훈이 <지조론(志操論)>을 쓴 것이 1960년 2월경, <새벽> 3월호에 발표했다. 1960년 3월의 악명 높은 3.15 부정선거 바로 직전이다. 이승만 정권은 거듭된 실정과 1인 장기집권으로 공정한 선거를 통해서는 정·부통령 선거에서 전혀 승산이 없음을 알고 경찰과 행정 기관 뿐만 아니라 반공청년단을 강화하여 이들을 일선 행동대원으로 앞세우는 등 관권 폭력선거를 획책했다.
3.15 정·부통령 선거를 앞두고 야당의원들의 탈당사태가 잇따랐다. 이승만 정권은 야당의원들을 빼내어 민주당의 전열을 흔들었다. 마산출신 허윤수 의원이 1월 6일 민주당을 탈당하고 같은 날 민주당 전 감찰위원장 김감근이 뒤를 따랐다. 1월 26일에는 경북 의성출신 김규만 의원, 2월 1일에는 경기도 용인출신 구철회 의원, 3월 2일에는 밀양출신 박창화 의원이 각각 민주당을 탈당하고 자유당에 입당했다.
이들은 탈당 성명에서 민주당의 신구파 내분을 들거나, 거창하게 국가민족의 장래로 보아 정권교체보다 정국안정이 필요하다는 이유를 내세웠다. 민주당은 허윤수 등 잇따른 탈당사태가 자유당 정권의 공작과 매수에 의한 것임을 지적하고 광화문 국회의사당 앞에서 규탄대회를 열었다. "변절자는 이완용이고 수절자는 사육신", "변절자 그대여, 부정한 황금은 조상의 이름을 더럽히며 후손에 오명을 남김을 그대는 아는가?" 라는 플래카드를 들고 시위를 벌였다.
변절자들은 야당의원들 뿐만 아니었다. 학자·문인·종교인·예술인 등 지식인들도 정·부통령선거에 이승만과 이기붕을 지지하는 성명을 내고 부정선거 대열에 합류했다. 1960년 3월 15일 부정선거의 규탄시위가 가장 먼저 벌어진 곳은 마산이었다. 민주당원들과 마산 시민들이 허윤수의 집으로 몰려가 변절자와 부정선거를 규탄하면서 마산의거가 시작되었다. 이처럼 일반 시민들은 부정선거 못지 않게 변절자들을 질타했다.
정치인의 가장 큰 덕목은 지조에 있었고 가장 큰 악덕은 변절이었다. 정·부통령 선거를 앞두고 권력에 매수되거나 돈에 팔려간 정치인은 패륜아로 취급되었다. 정치인의 변절행위는 장엄한 4.19 혁명의 시발점인 마산의거의 한 계기가 될 만큼 휴발성이 강한 도덕율이었다. 조지훈은 정치인들과 지식인들의 거듭되는 변절행태를 지켜보면서 2월 15일 <지조론>을 썼다. '변절자를 위하여'라는 부제가 붙은 <지조론>은 <새벽> 3월호의 권두논설로 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