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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군 전쟁 템플기사단이 수백 년 전에 만든 이 도시
2025-07-03 10:45:03
이상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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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마르는 템플기사단의 주둔지로 12세기 후반에 건설된 도시다. 1118년 만들어진 템플기사단은 십자군의 일원으로 기독교 성지 예루살렘을 수복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템플이라는 이름은 그들이 한때 주둔했던 예루살렘의 성전산(Temple Mount)에서 나왔다. 템플기사단이 유럽으로 철수하면서 구알딩 파이스(Gualdim Pais)가 1157년부터 포르투갈 군대를 이끌게 되었다. 그는 1160년 투마르 성채를 완공하고 거점을 그곳으로 옮겼다.

이후 예루살렘의 성묘교회를 모방해 그리스도 수도원 교회를 만들기 시작했다. 그 결과 1190년 원통형의 로툰다(rotunda)를 중심에 둔 로마네스크 양식의 교회가 완성되었다. 1319년 템플기사단이 해체된 이후 1318년 창립된 그리스도 교단이 투마르 성채와 교회를 관리하게 되었다. 이때부터 기사단원과 재산이 그리스도 교단으로 편입됐다. 1357년에는 그리스도 교단이 성채와 교회의 주인이 되어 수도원을 확장해 나갔다. 먼저 서쪽의 기도실을 성가대석으로 개조하고, 로툰다의 기둥과 아치를 시대에 맞게 바꾸었다.


해상왕 엔히케 왕자가 지배권을 행사하던 1417년부터 수도원에는 두 개의 회랑 건물이 지어졌다. 1426년에는 로툰다 동쪽에 상 조르지 경당을 새로 만들고, 수도원 아래 강가에 도시를 조성하기 시작했다. 1484년에는 주앙 2세의 사촌인 마누엘이 수도회장이 되어 성구실을 마련했다. 1492년에는 수도원 확장에 들어갔고 1495년 왕이 된 마누엘 1세의 도움으로 1499년 사제들의 생활 공간, 주 제단, 벽감, 기둥과 아치의 그림과 조각에 대한 대대적인 확장과 개조가 이루어졌다. 1504년에는 미사에 참여하는 신도들을 위한 교회가 만들어졌다.

템플기사단의 도시에서

이를 통해 그리스도에게 바친 신앙의 공간 로툰다, 신도들이 미사를 보는 교회, 회랑과 중정으로 이뤄진 사제들의 공간이 완성되었다. 주앙 3세 때인 1557년에는 르네상스 양식의 새로운 회랑 건설을 시작했다. 투마르 수도원은 로마네스크 양식에서 시작해 고딕, 마누엘, 르네상스 양식이 차례차례 덧붙여졌다. 그런 의미에서 투마르 성과 수도원은 포르투갈 건축의 역사를 보여주는 가장 중요한 사례가 되었다. 영토 회복 운동(Reconquista)에서부터 대항해시대에 이르기까지. 포르투갈인의 창조적 건축으로 1983년 유네스코 세계 유산에 등재되었다.


나방강변에 형성된 투마르는 크게 보면 테주강의 중류에 위치한다. 나방이라는 강 이름은 이곳에 형성된 고대 도시 나방티아(Nabantia)에서 유래했다. 해상왕 엔히케 왕자 때인 15세기 전반 댐을 만들어 홍수를 방지하고 수리 시설을 만들면서 투마르 주변이 옥토로 변했다. 이를 통해 도시 인구가 빠르게 늘어났고, 도시계획을 실시해 도로와 건축을 합리적이고 체계적으로 만들어나갔다. 1492년부터 에스파냐로부터 박해를 받던 유대인이 개방적인 투마르로 이주해 오면서 기술과 무역을 통해 도시의 부를 증대시켰다. 지금도 15세기에 지어진 유대인 교당이 잘 남아 있다.

1503년부터 1614년까지 그리스도 수도원에 물을 공급하기 위한 수도교가 만들어졌다. 투마르는 18세기에 공업도시로 발전했다. 수력 발전으로 기계를 돌릴 전기가 충분했기 때문이다. 해통(Jácome Ratton)이 직물공장을 차려 내수는 물론이고 식민지 국가에 수출까지 했다. 이와 함께 제지공장, 주물공장, 유리공장, 비누공장 등이 생겨났다. 1834년에는 그리스도 수도원이 해체되었다. 투마르에는 현재 2만 명 정도의 주민이 살고 있고, 외곽지역까지 포함하면 인구가 4만 명 정도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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