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도 기억난다. 아버지가 건네주신 야구 글러브에 박혀 있던 '5번'이. 그 5번은 82년 프로야구 개막식에서 만루 홈런을 친 MBC 청룡 이종도 선수의 번호였다. 여섯 살이었는지 일곱 살이었는지 잘 모르겠다. 야구 규칙도 잘 몰랐던 꼬마가 이종도 선수의 홈런을 보고 MBC 청룡 팬이 됐다. 지금까지 그 글러브의 잔상이 사진처럼 머릿속에 남아있었던 이유는 아마 무뚝뚝한 아버지가 주신 첫 선물이기 때문일 것이다.
초등학교, 아니 국민학교에 들어가면서 부모님을 졸라 MBC 청룡 어린이 회원에 가입을 했다. 그때 회비가 얼마였는지 검색해 보니, 5000원 정도다. 짜장면 한 그릇에 500원 정도 하던 시절에 만만치 않았던 금액이었다. 넉넉지 않던 형편에도 어머니는 야구를 좋아하는 아들에게 어린이 회원이라는 선물을 주셨다.
어린이 회원 기념품으로 무엇을 받았는지 정확한 기억은 나지 않는다. MS가 찍힌 파란색 모자와 종이 회원권, 얇은 점퍼, 이런 것들이 있었던 듯하다. 나는 아버지가 주신 글러브와 청룡 모자를 쓰고 하루 종일 골목에서 야구를 했다. 80년대만 해도 자동차가 없어 동네 골목은 작은 야구장으로 손색이 없었다. 야구공은 살짝 무른 공(경식)이었다. 진짜 야구공은 홍키공이라고 불렀는데, 맞으면 많이 아파 무서워했다.
배트와 글러브가 없으면 '짬뽕'이라는 짝퉁 야구 놀이를 했다. 투수와 포수만 없지 다른 룰은 야구와 똑같았다. 짬뽕공은 물렁물렁했는데, 아무리 세게 쳐도 홈런이 되기 힘들었다. 놀이터에서 할 때는 정글짐이나 그네 기둥이, 골목에서 할 때는 전봇대가 베이스가 됐다. 공은 툭하면 다른 집 지붕을 넘어 마당으로 넘어가, '공 좀 꺼내 주세요'라며 수시로 노래를 불렀던 기억이 난다.
당시 가장 인기가 높았던 야구팀은 해태, 롯데, 삼성이었다. 김봉연, 최동원, 이만수 같은 기라성 같은 선수들이 있었고, 84년까지 대전이 연고였던 OB에도 박철순이라는 스타가 있었다. 연고의식이 확실한 지방팀들은 항상 화젯거리가 됐다. 그러나 지역색이 옅었던 서울팀은 오히려 주목을 덜 받았다. 그럼에도 MBC 청룡 선수들은 어린 나에게 다른 어떤 선수들보다 영웅이었다.
감독 겸 선수였던 백인천의 호쾌한 타격, 하기룡의 묵직한 투구, 이광은의 다재다능한 플레이 그리고 데드볼을 불사하는 김인식의 투지까지, 모두 어린 나의 마음을 흔들기에 충분했다. 그중 최고는 김재박 선수였다. 엄청난 순발력으로 넓은 수비 범위를 자랑하며 공을 뿌려대던 유격수 김재박. 이종도 선수 홈런으로 입문해 김재박 선수에게 빠진 나는 좌우로 점프하고 공을 캐치하며 그를 따라 했다. 어린 시절, 야구는 친구들과 하던 놀이를 넘어 우리 팀과 선수라는 개념을 가슴 깊이 남긴 첫 스포츠였다.
세련되고 우아한 자율 야구, LG 트윈스
1990년 럭키금성이 MBC 청룡을 인수한다는 뉴스가 들려왔다. 팀명은 LG 트윈스. 야구팀을 운영하기에 벅찼던 MBC가 유일하게 야구팀이 없었던 대기업, 럭키금성과 합이 맞아떨어진 것이다. 로고도 바뀌고 색깔도 바뀌었지만, 다행히 선수는 그대로였다. 게다가 백인천을 다시 감독으로 선임하며 팬들의 마음을 반영했다.
창단 첫해 LG 트윈스는 말 그대로, 미쳤었다. 파란색에서 검흰으로 유니폼 색이 바뀌어서 그런가, 팀 컬러도 세련되고 젊게 보였다. 투수진은 철옹성 같았다. 14승을 기록한 김태원, 노련미의 끝이었던 김용수, 뱀 같은 공을 던지던 정삼흠, 젊은 패기 김기범, 대들보였던 최일언 선수는 새로운 팀이 흔들리지 않도록 마운드를 다듬었다.
나는 90년 LG 트윈스 선수들 중 김동수와 노찬엽을 좋아했다. 김재박, 이광은, 김상훈, 신언호, 윤덕규, 박흥식 같은 프랜차이즈 스타들이 팀의 토대였다면 포수 김동수와 외야수 노찬엽은 팀의 엔진이었다. 김동수는 정말 노련했다. 기본기가 뛰어나고 머리가 좋아 김용수와 정삼흠 같은 베테랑 투수들도 기꺼이 믿고 공을 뿌렸다.
검객 노찬엽은 나에게 터미네이터 그 자체였다. 김상훈 선수가 큰 키에 유연한 타격으로 어쨌든 안타를 만들 것 같았다면 노찬엽 선수는 크고 단단한 체구에서 외야로 호쾌한 타구를 날리곤 했다. 그가 타석에 서면 빈틈이 보이질 않았다.
중학생 사춘기였던 나는 TV보다 라디오로 야구중계를 듣곤 했다. 캐스터의 목소리에 귀를 쫑긋 세우고 투수와 타자들의 플레이를 상상했다. 좋아하는 선수들의 이름이 불리면 제발 스트라이크, 제발 안타가 나오기를 손에 땀을 쥐며 응원했다. 그리고 마침내 삼성 라이온즈를 꺾고 우승하는 날, 난 방에서 겅중겅중 뛰며 나의 영웅들을 찬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