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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년 지기 친구의 아버지 장례식에 다녀왔습니다
2025-06-25 10:46:59
문세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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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고> ㅇㅇ 병원 장례식장. S님의 부친 손ㅇㅇ님께서 별세하셨기에 삼가 알려드립니다.

2025년 6월 21일 토요일, 오후. 밀려있던 원고를 쓰려고 노트북을 켜자마자 카톡이 왔다.

S는 나의 중학교 친구다. 일주일 전 만났을 때만 해도 아버지가 아프다는 말은 없었는데 갑자기 무슨 일이람? 마감이 코 앞인 원고 때문에 마음은 좌불안석이다. 그래도 친한 친구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데 어떻게 안 가 볼 수가 있나. 주섬주섬 검은색 옷을 꺼내 다렸다.


갑작스러운 아버지의 임종을 접하고 부고장을 보내는 이의 마음은 어떤 마음일까. 50대 중반이 되니 부모님 상을 알리는 부고가 종종 온다. 나에게도 곧 닥칠 일이지만 최소 10년 안에는 그 일이 안 왔으면 좋겠다.

장례식장에는 검은 상복을 입은 S와 S의 남편, S의 동생들이 손님을 맞이하고 있었다. 향을 꼽고 아버님께 절 하고 상주와 맞절을 했다. 어릴 때 본 S의 동생들은 몇 십년 만에 본거라 반가움이 컸다. S의 여동생이 나를 기억하고는 "언니는 하나도 안 변했네"라며 웃었다.

30년 세월이 훌쩍 지나고 만났는데도 "그때랑 똑같다"라는 말은 천번을 들어도 싫지 않은 말이다. 그렇다고 슬픈 기운이 도는 장례식장에서 마냥 기분 좋은 얼굴을 할 수는 없는 노릇. 적당히 숨기고 '예'를 갖췄다.

청력 약한 나를 도와준 친구들

나는 초등학교 5학년 때 갑자기 청력이 안 좋아졌다. 어리둥절하기를 잠시, 곧 6학년이 되었다. 당시에 아버지는 이혼을 하고 홀로 4남매를 키워야만 했던 상황이었다. 남자 홀로 자식 네 명을 키우는 게 쉬운 일인가. 아버지는 누나(나의 고모)의 도움을 받기로 결심하고 누나가 사는 경기도 오산으로 이사를 가기로 결심한다.

40년 전 경기도 오산은 시골이었다. 나는 시골 초등학교로 전학을 간다는 것에 자존심이 상했다. 서울은 한 학년에 열 반이 넘었는데 전학 간 오산 초등학교에는 한 학년에 달랑 두 반 뿐이었다. 오산에서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 1학년 1 학기까지 마친 후 다시 서울로 이사를 왔다.

전학 간 학교는 서울의 한 대학교의 부속 여자중학교였다. 언덕배기 끝에 중학교와 고등학교가 나란히 있다. 중학교는 고등학교 보다 더 꼭대기에 있었다. 학교 한번 가려면 등산을 하는 것과 같은 난이도를 겪어야 했다. 쉬지 않고 한 번에 올라가기가 힘들다. 대부분의 학생들은 언덕길을 올라가다 반드시 한 번씩 쉬었다.

"학교가 왜 이렇게 높은 곳에 있어? 다른 학교로 전학 가면 안 돼?"

키 작은 중학생 여자 아이는 아버지에게 투덜대며 언덕길을 올랐다.

학교 생활은 쉽지 않았다. 무엇보다 수업을 듣는 게 힘들었다. 선생님의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봐야만 선생님이 하는 말을 알아들을 수 있기 때문이다. 아이들이 엎드려 메모를 할 때, 나는 선생님을 쳐다봤다. 가끔 딴짓 하느라 선생님 얼굴을 안 보고 다른 곳을 보다 다시 선생님 얼굴을 보면 맥락을 놓치기 일쑤다. 그럴 때 짝꿍에게 물었다.

"방금 선생님이 뭐라고 했어? 지금 말씀 하시는 것은 교과서 어디쯤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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