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년 8월이면 우리는 늘 아픈 기억을 소환하고, 잊지 말아야 할 것들을 되새긴다. 놓쳤던 것들을 다시 붙잡고, 소중한 것들을 지켜내기 위해 마음을 다잡는다. AI 기술로 빛바랜 사진 속 영웅들을 되살려 독립 만세를 외치게 하고 함박 웃음을 웃게도 한다. 어느 기업은 매년 이맘때쯤이면 광복을 기억하는 영상을 만들어 민족 의식을 고취하고, 전 국민에게 사랑을 받아온 아이스크림의 수익금 일부로 독립 유공자 자손을 위한 장학 사업도 하고 있다고 한다.
우리는 특별한 민족이다. 지구상에 유일한 분단 국가에 살아가지만, 두려움으로 위축되어 살지 않는다. 음악으로 세계를 제패하고, 스포츠로 세계를 열광하게 한다. 불과 백 년도 안 된 과거에 그토록 잔인하게 우리 민족을 말살하려 했던 이웃 나라를 곁에 두고도 단단하고 호기롭게 경제를 일으키고, 민주주의를 발전시켜 왔다.
때로는 우리의 미숙한 현실이 자존감의 발목을 잡기도 하지만, 괜찮다. 이만하면 잘 살아왔다. 그리고 앞으로도 잘 살아갈 것이다. 우리가 했던 실수들을 바로잡기 위해, 촛불을 들고 광장에 나서는 의기가 있다면, 가슴 아픈 4월을 기억하며 '가만히 있지 않겠다'는 결심을 지켜나간다면, 우리의 다음 날도, 그 다음날도 단단하게 세워지고 이어질 것이다. 삐걱거리며 걷는다 할지라도 멈추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어느 날인가에는 훌쩍 성장한 우리를 보게 될 것이다.
오랜 시간 기억 되어야 할 이야기
급변하는 시대에 오래 기억되는 책은 많지 않다. 시류에 맞는 이야기는 쉽게 쓰여지고, 쉽게 잊혀진다. 더 이상 논의할 쟁점이 사라지고, 담아두어야 할 가치 역시 흐려지고 만다면 그 책은 금세 절판되고, 독자의 기억 속에서도 사라지게 될 것이다.
<마사코의 질문>은 2009년에 초판을 찍은 책이다. 2025년인 오늘까지 묵묵히 살아남았다. 몇십만 부가 팔리는 기염을 토하지는 않았지만, 오래 살아 남았으니 가지고 있는 가치를 충분히 입증한 셈이다.
작가 손연자는 1944년에 서울에서 태어났다. 해방 즈음에 태어났으니, 격동의 시대를 살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동화는 어둡지 않다. 같은 시대를 산 권정생의 동화가 아픔 속에서 희망을 찾아가는 삶을 보여주었다면, 손연자의 동화는 상처를 어루만지는 따뜻함을 담고 있다. <손연자 동화 선집>(손연자 글, 최지훈 해설, 지식을만드는지식)에서 그녀는 이렇게 말한다.
스티븐 깅은 <유혹하는 글쓰기>에서 '좋은 글이란 사람을 취하게 하는 동사에 깊은 생각에 잠기게 한다'고 했다. 아동문학 작가는 어린이를 취하게 하고 깊은 생각에 잠기게 하기 이전에 먼저 자신이 그들 눈높이에 합당하게 취하고 사려 깊은 생각에 잠겨야 한다는 요구를 받는다.
그의 글은 그의 생각처럼 반듯하고, 정갈하다. 바른 것을 배워야 할 아이들에게 바른 말과 바른 글, 바른 생각이 시나브로 생기게 한다. 가르치려 하지 않고 오히려 위로하는 그는 대부분 행복에 관해 이야기 한다. 삶이 그리 좋지 못한 상황일지라도 웃으며 행복을 찾아갈 힘을 준다.
입양아가 주인공인 <까망머리 주디>를 쓰기 전, 그는 주인공을 행복한 입양아로 할 것인지, 불행한 파양아로 할 것인지를 고민했다고 한다. 결국 그의 결정은 행복한 입양아였다. 기억을 하든 못 하든 이미 생의 존엄을 훼손 당하고 상실의 고통을 겪었으므로 불빛이 따사로운 벽난로로 데려가는 것이 마땅하다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이것이 그의 동화 세계를 설명하는 가장 적당한 말이 될 것 같다. 손연자의 동화는 벽난로처럼 따듯하다. 기어이 자기 몸을 불태워 열기를 뿜어내는 벽난로의 숯처럼 매섭지만 가까이 오도록 곁을 주는 따스함이 있다.
<마사코의 질문>은 민족의 수난기였던 일제 강점기에 식민지 백성이 겪어야 했던 고난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말과 글을 빼앗겨야 했던 아픔을 다룬 '꽃잎으로 쓴 글자'로 시작하여, 해방이 한참 지난 오늘을 사는 세대에 문제 의식을 던져주는 '마사코의 질문'까지, 9편의 동화가 온전히 일제의 만행을 다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