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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육사 최후의 졸업생... "국가를 위해서? 중요치 않았다"
2022-10-03 20:55:24
박광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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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이어지고 일본-러시아 관계가 요동치는 가운데, 일본 사회에선 제2차 세계대전 패전 직후 '시베리아 억류자' 문제가 새삼 회자되기도 한다.

1945년 8월, 일본과의 불가침조약을 파기하고 만주와 남사할린, 치시마열도(현 러시아령 쿠릴열도)로 진격해 들어간 소련군은 일본군 포로 60만 여 명을 시베리아, 몽골 등지로 보냈다. 2000여 곳에 달하는 수용소에 분산 수용된 일본군 포로들은 철도건설, 탄광노동, 농업 등에 투입됐다. 억류기간동안 중노동이나 학대, 위생시설 미비, 역병 유행 등으로 사망한 일본군 포로는 5만 명 이상에 이르는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47만 명만이 살아서 일본으로 귀국할 수 있었다.

빈농의 아들, 일본육사에 진학하다

지난 25일 만난 효고현 탄바사사야마시의 타카하시 마사루(高橋勝, 96)씨 역시 패전 후 소련군에 의해 2년 간 시베리아에 억류됐던 기억을 갖고 있다. 기자의 명함에 적힌 '박(朴)씨' 성을 본 타카하시씨는 대뜸 "박정희 대통령의 친족이냐"는 질문을 던졌다. 그에게 있어 박정희 대통령은 일본육군사관학교 1년 선배다. 일본이 패전했던 1945년에 육군항공사관학교를 졸업한 그는 일본육사 최후의 졸업생이기도 하다.

가난한 농가에서 5남매의 장남으로 태어난 타카하시씨는 "돈이 없어서 육사에 갔다"고 말한다. 장교를 양성하는 육군사관학교는 학비가 무료였고, 숙식·피복도 무료였으며 소정의 봉급도 나왔다. 그는 오직 돈 걱정 없이 공부하고 싶다는 일념으로 육군사관학교 진학을 결심했다.

"천황 폐하를 위해서, 국가를 위해서라고 입으로는 말하지만 사실 그런 건 중요치 않았어요. 우리 집은 돈이 없었고, 공부를 계속하기 위해서는 사관학교에 가는 수밖에 없었어요."

명석했던 농촌 중학생은 엄청난 경쟁을 뚫고 1941년 육군예과사관학교에 합격했다. 빈농의 아들로서 육군예과사관학교에 합격했다는 것은 스스로에게도 가족에게도 마을 사람들에게도 큰 자랑거리였다. 입교식에는 천황이 행차하고 세계 각국의 대사들과 주재 무관들까지 찾아왔다. 일본 육군이 제국의 몸통 그 자체였던 그 시대에 육사에 들어간다는 것은 상상 그 이상의 의미였다.

그러나 영광은 순식간에 짓밟혔다. 입학식이 거행된 바로 그 날, 타카하시씨는 선배로부터 납득할 수 없는 이유로 구타를 당했다. 선배는 타카하시씨가 "어슬렁어슬렁 걸어 다녔다"는 트집을 잡으며 뺨을 후려쳤다. 창졸 간의 따귀에 정신이 흐려지는 가운데, 타카하시씨는 그곳이 "상식이 통하지 않는 세상"이라는 것을 직감했다. 괴롭고도 어처구니없어서 그냥 집에 돌아가버리고 싶은 생각마저 들었다.

그러나 숱한 난관을 뚫고 합격해서 입교식까지 치른 마당에 포기할 수는 없었다. 온갖 부조리들을 꾹꾹 참고 학업을 이어간 티카하시씨는 이내 예과사관학교에서도 두각을 드러낼 수 있었다. 우수한 성적으로 2년 간의 예과 과정을 마친 타카하시씨는 '엘리트 중의 엘리트'만이 갈 수 있다는 육군항공사관학교로 진학하게 됐다. 그의 나이 17세, 1943년의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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