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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장 풀가동해 상황 역전... 1위 탈환하고 사명도 바꿨다
2024-09-07 20:07:10
윤한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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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주 한 병에 122원 식... 즉 국산품 금관표와 오삐표의...대리점업자 최고판매가격은 일백 이십이 원으로 개정되었다 - 1948년 8월 20일 <경향신문>

75년 전 우리 맥주의 첫 이름은 금관표와 오삐표였다. 금관표의 주인은 지금의 하이트진로다. 하이트진로도 오비맥주와 마찬가지로 적산 기업에 뿌리가 있다. 1933년 서울 영등포에 설립된 대일본맥주회사가 해방과 한국전쟁을 거치며 하이트진로의 전신 조선맥주가 된다.

1952년 민덕기라는 인물이 미군정에서 조선맥주를 불하받는다. 그가 초대 대표가 될 수 있었던 배경에는 대일본맥주회사의 조선인 주주 민대식이 있었다. 민대식은 대표적인 친일 세도가였던 민영휘의 차남으로 일제 강점기 조흥은행의 초대 은행장이었다. 해방 후 일본인 주주들이 사라진 대일본맥주를 관리했던 이력이 아들 민덕기를 대표로 만들었다.

민덕기는 사재까지 털며 폭격 맞은 맥주 공장을 복구했다. 금관표라는 상표도 이때 크라운맥주로 바뀌었다. 1953년 9월 7일 자 <경향신문>에 실린 광고를 보면 금관 대신 왕관이 상표가 된 것을 알 수 있다.


시작은 나쁘지 않았다. 1954년에는 주한 UN군에 맥주를 납품하기도 했다. 하지만 곧 큰 먹구름이 조선맥주 위에 드리웠다. 독과점 시장이었지만 동양맥주와의 싸움이 만만치 않았다. 당시 맥주 시장은 총판 대리점을 얼마나 확보하고 끈끈한 관계를 유지하는지가 관건이었다.

당시 맥주 유통은 생산자, 총판 대리점, 도매상, 소매상의 단계를 거쳐야 했다. 독과점 시장, 고정된 생산단가, 크라운맥주와 오비맥주라는 단순 브랜드로 구성된 시장 구조 속에서 판매량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누가 더 많은 점유율을 가져가는지가 핵심이었다.

실질적인 영업과 판매의 주체는 대리점이었다. 충성심 높은 대리점을 전국적으로 촘촘하게 조직해야 과점 싸움에서 이길 수 있었다. 조선맥주는 이 부분에서 동양맥주에 밀렸다. 아무래도 오랫동안 장사를 해온 두산의 박씨 가문이 이런 면에서 우세할 수밖에 없지 않았을까.

하지만 결정타는 따로 있었다. 1955년 서울지검의 세무조사에서 조선맥주가 세금포탈 혐의를 받은 것이다. 5400만 환을 추징받은 조선맥주는 그 충격으로 1957년 동양맥주에게 추월당하며 2인자가 된다.


새로운 주인을 찾다

한번 역전된 시장은 되찾기 쉽지 않았다. 1958년에도 여전히 세금 문제로 어려움을 겪던 조선맥주는 파산 직전, 1965년 조흥은행의 법정관리를 받게 된다. 법정관리인으로 당시 사세청장 김만기가 임명되었다.

재무당국자는...사세청장 김만기 씨가 조선맥주주식회사 사장 민덕기 씨의 법정관리인으로 임명됨으로써 수일 내 사세청장직을 사임할 것이라고 말하였다. 조선맥주의 세금 체납 오억오천만을 청산하기 위한 것으로서 정부는 앞으로 상당액을 운영자금으로 융자할 것을 추진 중에 있다. - 1958년 12월 6일 <경향신문>

조선맥주에 공적자금이 투입된 셈이다. 그러나 상황은 더욱 악화되어 갔다. 결국 1년 만에 한일은행이 다시 관리에 들어갔고 1965년이 되어서야 겨우 안정을 되찾았다. 그 뒤 다시 민덕기가 대표로 복귀했으나, 은행이 관리했을 때보다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다.

자금난에 봉착할 무렵 조선맥주의 새 주인이 나타났다. 대선발효 박경규였다. 대선발효는 부산에 적을 둔 주정회사로 다이아소주와 호텔 사업을 하며 큰돈을 벌고 있었다. 1968년 <매일경제>에 따르면 1966년 대선발효가 지급한 조선맥주 인수대금이 약 2~3억 원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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