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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농민군 진압했다며 잔치를 벌인 왕
2024-09-16 18:03:16
이영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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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혁명이 좌절된 후 침략적 외세, 특히 일제에 저항할 어떤 세력도 남아나지 못할 지경에 이르렀다. 자력으로 나라를 지킬 힘이 없으니 조선은 무주공산이다. 침 흘리는 늑대 앞에 그야말로 맨몸으로 내놓인 가련한 어린 양이나 진배없었다. 그래서였을까? 참으로 어이없는 광경이 벌어진다.


동학혁명이 막을 내리자, 왕은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 눈물 흘리며 참회하였을까? 아니면 잔치를 베풀어 이를 축하했을까? 불행하게도 후자였다.

갑오개혁 정권은 '일군만민'의 이상을 내건 동학농민혁명을 압살하면서도, 농민군의 요구를 대부분 정책화했다. …(중략)… 대부분 공문구가 되고 말았다. 결국 갑오개혁은 민중의 염원에 반하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중략)… 그것은 청일전쟁의 일환이기도 했던 동학농민군에 대한 탄압 종료를 경축하고 조선과 일본 양국병사를 위로하고자 1895년 2월 5일(양력 3월 1일) 고종이 개최한 대축하연에서 만세를 서로 화창했다는 사실이 잘 상징하고 있다.

고종이 양국 군 장교를 접견한 후 개최한 축하연 자리에서 쿠스노세 중좌가 '이노우에 공사의 명령을 받아 먼저 일본 장교 일동을 대신해 황공하게도 조선의 대군주 폐하께서 이러한 후의를 베풀어 주신 것에 감사드리고, 모인 사람이 모두 대군주 폐하 만세'를 삼창했다. 그에 호응해 내무대신 박영효가 '대일본 황제 폐하 만세'를 선창하자, 일동이 또다시 만세를 삼창했다.

비공식적으로는 전날 조일 양국 군이 서울로 개선했을 때 고종이 칙사를 보내자, 그 자리에서 '동학당 정토군지휘관'인 일본 육군 소좌 미나미 코시로의 선창으로 '대조선국 대군주 폐하 만세'와 '대일본 황제 폐하 만세'를 삼창했었다. (민중과 유토피아. 조경달. 허영란 옮김. 역사비평사. 2009. p139~140)

참으로 어이없는 광경이다. 수십만의 백성이 목숨을 잃었는데, 잘 죽였다며 축하연을 열어 만세 부르는 기이한 장면에 아연 넋이 나갈 정도다. 그것도 국왕이라는 사람에 의해. 여기에 박영효가 '대 일본 황제 폐하 만세'를 삼창했다니 더욱 기막힐 노릇이다.


양반으로 임금 사위이자 벼슬아치에서 갑신정변을 일으킨 개화파로, 일본에 망명한 후 전봉준을 심문한 서광범과 함께 귀국하여 을미개혁을 주도한 인물. 을사늑약 후에는 후작으로 봉해져 일본 귀족으로 한평생 호의호식한 악질. 우린 왜 이런 인물 하나 제대로 징벌하지 못했을까?

갑오개혁과 그 한계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조선을 손아귀에 넣어 본격적인 식민화 작업에 착수한다. 왕권을 약화하고, 자주적 개혁 세력 제거에 나선다. 또한 일본의 군사적 이익을 서서히 늘려나가는 정책을 강요한다.


청일전쟁 때 구축한 병참선을 십분 활용 한반도를 장악해 나간다. 개항을 압박·강제하여 질 좋고 값싼 쌀과 농산물을 착취하고, 경제적 침탈을 자행한다. 이로써 일본 군수산업 공업화의 초석으로 삼는다.

갑오개혁을 이끈 정권은 일본의 꼭두각시였다. 정권 내부에도 급진파와 온건파가 공존하면서, 청과의 오랜 종속관계 청산을 두고 대립한다. 정치체제도 입헌군주제와 부분적으로 제한된 전제적 왕권 유지로 맞선다. 농민군이 주장한 토지 분작은 손도 대지 못했고, 세금의 금전 납부라는 부분적 개량조치에 머물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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