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오개혁 정권은 '일군만민'의 이상을 내건 동학농민혁명을 압살하면서도, 농민군의 요구를 대부분 정책화했다. …(중략)… 대부분 공문구가 되고 말았다. 결국 갑오개혁은 민중의 염원에 반하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중략)… 그것은 청일전쟁의 일환이기도 했던 동학농민군에 대한 탄압 종료를 경축하고 조선과 일본 양국병사를 위로하고자 1895년 2월 5일(양력 3월 1일) 고종이 개최한 대축하연에서 만세를 서로 화창했다는 사실이 잘 상징하고 있다.
고종이 양국 군 장교를 접견한 후 개최한 축하연 자리에서 쿠스노세 중좌가 '이노우에 공사의 명령을 받아 먼저 일본 장교 일동을 대신해 황공하게도 조선의 대군주 폐하께서 이러한 후의를 베풀어 주신 것에 감사드리고, 모인 사람이 모두 대군주 폐하 만세'를 삼창했다. 그에 호응해 내무대신 박영효가 '대일본 황제 폐하 만세'를 선창하자, 일동이 또다시 만세를 삼창했다.
비공식적으로는 전날 조일 양국 군이 서울로 개선했을 때 고종이 칙사를 보내자, 그 자리에서 '동학당 정토군지휘관'인 일본 육군 소좌 미나미 코시로의 선창으로 '대조선국 대군주 폐하 만세'와 '대일본 황제 폐하 만세'를 삼창했었다. (민중과 유토피아. 조경달. 허영란 옮김. 역사비평사. 2009. p139~1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