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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 살려 달라 않겠다'며 죽은 이 남자, 노래로 남다
2024-09-08 11:00:53
이영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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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혁명의 고갱이는 단연코 단두대다. 이로써 봉건이 해체되고, 공화정이 열려 자본주의 맹아가 싹텄다. 반면 동학혁명은 거기까진 이르지 못했다. 왕의 목을 베지도 봉건을 해체하지도 못했다. 둘 사이엔 커다란 차이가 있었으니, 바로 제국주의다.

청일전쟁이 한반도 쟁탈전이라면, 러일전쟁은 만주를 놓고 다툰 국제전이었다. 영국을 비롯한 서구 열강은 두 전쟁에 다분히 이율배반적인 모습을 보인다. 청일전쟁은 방관자에 가까웠다. 중국을 경제적으로 지배하면, 배후 조종만으로 한반도에서 이익은 보장된다고 보았다. 일본이 승리한다 해도 외교적으로 타협할 지점이 상당하다고 여겼다.

하지만 러일전쟁은 차원이 달랐다. 부동항을 찾아 끊임없이 남하하는 러시아는, 영국과 '그레이트 게임(The Great Game)'을 벌이며 세계 곳곳에서 다투는 존재였다. 따라서 영국을 비롯한 서구 열강이 어느 편에 섰으리라는 건 명확하다.


그렇다면 그들은 동학혁명을 어떤 시선으로 바라보았을까? 혁명은 진압되고, 조선은 누구이건 속국을 벗어나지 못할 거라는 시각이 우세했다. 1876년 강화도조약이 체결되자, 부랴부랴 조선과 수교에 나설 때와는 천양지차였다.

무엇보다 일본이 침략적 제국주의에 편입하려는 조짐을 보였기 때문이다. 청일전쟁은 그 리트머스였던 셈이다. 시모노세키 조약에 반발한'3국 간섭(1895.04)'이 그 방증이다. 이런 측면에서, 자주 국가를 세우려 싸웠던 동학혁명 패배가 그래서 더 뼈아프게 다가온다.

다시 피어나는 녹두꽃... 법관과 나눈 치열한 대화

우금티 학살은 월등한 무기와 화력을 앞세운 일본이, 조선을 대리하여 저지른 명백한 범죄였다. 동학혁명에 나선 농민군은 기꺼이 장렬한 최후를 맞았고 이는 자주적 민족운동의 지향과 나쁜 권력에 대한 항쟁, 그리고 민중이 역사의 전면에 나서야 한다는 자각을 일깨워주었다.

이후 민중은 항일 무장 의병으로, 3·1운동의 주 항쟁 세력이었다. 또한 1920년대부터 만주 등지에서 독립운동의 기틀이 되었다. 국내에서도 저항적 민족주의의 모태가 되었으며, 각 지역에서 소작쟁의 등 일본의 수탈에 저항하는 주체세력이었다.

특히 전라도에서는 동학혁명이 혈연적이고 실존적인 실체로 작동하였다. 이는 부·조부 등 동학혁명에 참여한 가족 이력이 광주학생운동으로 암태도 소작쟁의로 이어졌고, 지리산을 근거지로 항일 빨치산 투쟁을 이어간 뿌리가 되었다.


민족·민주·자주를 지향하는 변혁 세력이 거세되어버린 해방 이후, 꿋꿋한 진보의 정신적 기반이기도 했다. 동학에서 태동한 항쟁 및 해방운동의 전통과 맥락은 4.19와 광주민주화운동에도 잇닿아 있다. 이처럼 동학혁명이 피워낸 녹두꽃은 이 순간에도 앞으로도 끊임없이 피어날 것이다.

이때 전봉준은 전시에 다리가 상한 바 되어 짚둥우리에 누워 있는 채 그대로 법정에 들어왔다. 법관들은 좌우 나졸을 호령하여 일으켜 앉히라 하였다. 전봉준은 말하되, "내 능히 알지 못하노니 너희는 할 말이 있거든 아무렇게나 말하라."
<법관>
네 일개 죄인이라 어찌 감히 법관의 앞에서 이같이 공손하지 못한가.
<전봉준>
네 어찌 감히 나를 죄인이라 말하는가.
<법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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