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빙 사극 <우씨왕후>의 주인공은 형이 죽은 뒤 동생과 결혼하는 형사취수혼을 서기 197년에 대담하게 성사시켰다. 이 일로 인해 그는 <삼국사기>에 대문짝만하게 실리게 됐다. 웬만한 주요 사건은 가급적 한 문장으로 간단히 처리하는 이 역사서는 우씨왕후의 재혼에 대해서만큼은 꽤 길고 상세히 묘사했다.
그는 남편인 고국천태왕(고국천왕)의 죽음을 비밀로 한 채, 그날 밤중에 시동생들을 찾아다니며 새로운 남편감을 물색했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산상태왕(산상왕) 편은 그런 우씨왕후의 모습을 한 편의 단편소설처럼 극적으로 서술했다. 시도했다는 사실만으로도 대단한 일을 새벽닭이 울기 전까지 성사했으니, 김부식을 비롯한 보수적인 유학자 집필진도 한두 문장으로 간단히 기술하고 끝내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시동생 찾아간 우씨왕후
우씨왕후는 두 명의 시동생을 찾아가 왕위를 제안하고 연대를 제안하는 도박을 벌인 끝에 작은 시동생 고연우와의 동맹했다. 우씨는 이 혼인을 성사시켜 남편이 죽은 다음 날 차기 군주의 왕후가 되는 데 성공했다.
우씨의 첫째 시동생인 고발기는 그날 밤 우씨의 첫 번째 방문을 받았지만, 형의 죽음을 알지 못해 형수에게 퇴짜를 놓았다. 그러면서 "부인이 밤중에 돌아다니는 것은 예법이 아니다"라며 무안까지 줘서 형수를 내보냈다.
고발기가 우씨로부터 받은 제안은 "태왕이 후사가 없으니 그대가 계승하는 게 마땅하다"는 것이었다. 태왕이 죽었다는 사실을 감춘 채 그런 제안을 했으므로, 고발기는 당연히 퇴짜를 놓을 수밖에 없었다.
이 같은 고발기의 반응은 우씨의 접근 방식을 업그레이드시켰다. 우씨는 그 직후에 둘째 시동생 고연우를 만났을 때는 전혀 다른 접근법을 구사했다. 이번에는 태왕의 죽음을 미리 알려주고 동맹을 제안했다. 이 방법은 주효했다.
다음 날 새벽, '고연우에게 왕위를 넘긴다'는 고국천태왕의 유언이 발표되고, 훗날 산상태왕으로 기억될 고연우가 태왕 자리에 올랐다. 정상적인 경우라면 고발기에게 넘어갔을 왕위가 우씨와 연합한 고연우에게 넘어간 것이다.
이 사건은 엄청난 후폭풍을 초래했다. 새벽에 왕궁에서 일어난 일을 듣고 자신이 왕위를 도둑맞았음을 알게 된 고발기는 초법률적 수단을 동원했다. 우씨·고연우 혼인무효소송이나 고연우 즉위무효 소송 같은 것에는 의존하지 않았다. 그는 군대를 동원해 왕궁을 포위하는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하려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