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홍아선의 <그곳에서 In There>(2025년 3월 출간)은 어떠한 효과음과 말풍선도 일절 활용하지 않고 이야기를 풀어낸다. 이런 그래픽 노블은 오랜만이다. 오로지 그림과 칸만이 존재한다. 칸과 칸으로 옮겨지는 과정에서 독자가 만들어내는 상상만이 텍스트 주변을 맴돈다. 말풍선도 효과음도 만화에서 운용되지 않는다는 것은, 작가가 암묵적으로 독자들에게 '상황'이나 '그림'에 주목해 달라고 부탁하는 것 같다. 그림에 나타난 표정을 곱씹어 달라고 애원하는 듯하다.
말풍선 없는 연출은 낯선 것이 아니다. <로봇 드림>(놀, 2024), <내 이름은 마라솔>((주)푸른책들, 2023), 강풀의 <어게인> 9화 '포지션 4편', 마영신의 <엄마들>(휴머니스트, 2015) 등과 같은 작품에서도 이런 방법론이 '부분적'으로 운영된다. 그러니 효과음과 말풍선 없는 만화는 놀랄 일이 아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부분적'이라는 말이다. 기존의 작품과 다르게 작가 현홍아선은 부분을 '전체'로 바꾼다. 언어는 사라진 채 오로지 그림과 칸만이 시간 속을 힘차게 유영한다.
동시대의 웹툰이 가독성을 높이기 위해 문장력과 묘사력을 등한시했다면, 이 작품은 기존의 웹툰 문법을 과감히 포기함으로써 새로운 지점에 다가가고자 한다. 현미경처럼 세세하게 보여주는 방법론을 선택해 제주도 해녀의 삶을 차갑게 그려낸다. 1940년대부터 지금까지 물질하며 살아가야만 했던 한 해녀의 삶을 담담한 흑백 톤으로 그려낸다. 해녀 일을 했던 엄마와 그 일을 물려받을 수밖에 없는 한 여성의 이야기를 그린다.
텍스트에 그려진 이 시간의 기록이 실제로 있었던 일인지는 확인할 수 없으나,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이야기라는 점에서 독자들은 제주도 해녀가 어떤 삶을 살았었는지 간접적으로나마 느낄 수 있다. 요즘은 젊은 해녀를 제주도에서 쉽게 찾을 수 없다는 점에서 이 텍스트로 인해 펼쳐진 삶의 기록은 값진 의미를 지닌다.
서두에서 말한 것처럼, <그곳에서>는 말풍선도 효과음도 없다고 했다. 하지만, 이 과정이 무작정 칸의 나열로 끝나는 것은 아니다. 작가는 시대를 구분해 표현하고 싶은 메시지를 의도적으로 내보인다.
말풍선(언어)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인물의 '이름'이 언급되지는 않지만, '흉터'라든지 '점'과 같은 표시를 활용해 인물의 '차이'를 뚜렷이 구분한다. 그러니 독자들은 어렵지 않게 인물이 누구인지 파악할 수 있다.
작가는 이름을 명명하지 않았을 뿐이지, 얼굴에서 확인할 수 있는 특정 표시를 통해 구체적으로 인물을 충분히 그려낸다. 그리고 이런 표현의 대상은 다름 아닌, 해녀인 엄마와 해녀가 된 딸이다. 독자들은 작가의 이런 의도를 충분히 느낄 수 있으니, 현홍아선이 그린 그림과 칸의 서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