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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가 철거 안 돼" 정조의 뚝심이 만든 뭉클한 결과
2025-08-30 11:44:50
이영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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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의 원대한 구상을 속속들이 알고 싶다. 톱니바퀴처럼 실행에 거침이 없어서다. 아버지 능을 옛 수원부 뒷산으로 이장한다. 관청을 옮기고 민가엔 보상비와 이주비를 지급하며 팔달산 아래 수원부로 이주를 권장한다.

1790년 6월 강유가 수원부에 성을 쌓자고 건의한다. 여론이 모인다. 홍문관의 젊은 관료 정약용에게 설계 및 도시계획이 맡겨진다. 1791년이다. 여러 전문가와 경험자가 제외된다. 새로운 시도에 전혀 다른 성곽을 원했기 때문이란다. 과연 그럴까?


반은 맞다. 명례방 공동체 사건(1785)으로 다산이 가톨릭 신자임은 공공연한 사실이다. 그때 진산사건(1791)이 일어난다. 왕도 마냥 가톨릭을 감쌀 수만은 없는 처지다. 윤지충과 권상연을 사형에 처한다. 다산마저 위태해 보인다. 북경 가톨릭을 통해 신기술과 산술, 새로운 기기 등에 문리가 트인 신하다. 아끼고 싶지 않았을까. 그래서 신도시 계획과 설계라는 막중한 임무를 떠안긴 게 아닐까.

이듬해 겨울 다산이 왕에게 성설(城設)을 올린다. 성의 규모와 형태, 축성 재료의 출처와 시공 방법, 소요 인원 및 예산까지 낱낱이 명기했다. 다산이 제시한 둘레는 4.24km 남짓이다. 이외에도 각종 도설(圖說)로 성곽의 세부 설계도를 제시한다. 다산의 설계는 '어제성화주략(御製城華籌略 왕이 저술한 화성 축조 기본방안)'이란 이름으로 <화성성역의궤>에 오롯이 수록된다.

이어 세세한 재료 조달 방안이 수립된다. 1년여 준비 기간을 갖는다. 성곽 축조를 맡을 임시 기구로 '성역소(城役所)'를 구성하고 책임자로 채제공을 임명한다. 공사 총괄은 수원 유수 조심태가, 실무 책임자는 이유경이 맡는다.


석재와 벽돌은 물론 목재와 각종 건자재 조달 계획을 꼼꼼하게 수립한다. 동원될 분야별 전문 기술자를 팔도에서 모집한다. 석공, 목공 등 기술자와 막노동꾼 임금까지 세세하게 책정한다. 유형거(수레)와 거중기, 녹로(도르래를 이용, 무거운 물건을 들어 올리는 기구) 등 무거운 석재를 나르고 들어 올릴 기기를 마련한다. 이제 착공이다.

버들잎 닮은 성곽

화서문 쪽 팔달산 경사가 완만하다. 숨이 가빠지자 나타난 장대가 웅장하다. 왕이 이곳에서 성벽 쌓을 자리를 따라 꽂아 둔 깃발을 살폈다. 실록을 보면, 다산이 설계한 성곽이 이 자리에서 더 넓혀진다.

1894년 1월 14일 화성에 당도한 왕이, 15일을 무척 바쁘게 보낸다. 일을 마치고 16일 새벽 2시경 한양에 도착했으니, 배행한 신하들이 한겨울에 얼마나 고단했을까. 15일 실록은 화성을 어찌 쌓을지 왕의 구상을 여과 없이 보여준다.


팔달산에 올라 성 터를 살핀다. 허허벌판 5∼6호이던 민가가 4년 만에 1천여 호로 불어났다. 집들이 즐비하다. 무척 흐뭇하다. 꼭대기에서 성곽 가장자리를 두루 살핀다. 산꼭대기를 하늘과 땅이 만들어낸 장대(將臺)라 칭하며 '깃발 꽂아놓은 곳을 보니 성 쌓을 범위를 대략 알겠으나 북쪽에 자리한 마을의 민가를 철거하자는 논의는 좋은 계책이 아닌 것 같다. 현륭원이 있는 곳은 화산(花山)이고 이 부(府)는 유천(柳川)이다'라고 말한다.

또 요(堯)임금을 본받아 성을 화성(華城)이라 부르자며 '유천에 쌓을 성은 남북을 좀 더 길게 하여 마치 버들잎 모양처럼 만들면 참으로 의의가 있을 것이다. 그러면 북쪽 모퉁이 민가들이 서로 어우러진 곳에서 (성벽이) 세 굽이로 꺾여 川(천)자를 상징하게 되니 유천에 꼭 들어맞지 않겠는가'라면서 성을 넓히자는 의견을 낸다. 성을 넓힐망정 민가를 철거하지 말자는 의견이다. 성 둘레가 5.74Km로 된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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