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사회의 정치적 갈등이 지금보다 격했던 시기는 해방 직후다. 백범 김구, 몽양 여운형, 고하 송진우 등의 비극에서 나타나듯이 이 시기의 갈등은 많은 사람의 목숨을 앗아갔다. 대구 10월항쟁, 제주 4·3항쟁, 여순항쟁, 그 외의 민간인 학살 등에서는 수많은 대중이 희생됐다. 대한민국은 이때의 상처를 치유하는 일에 아직도 매달리고 있다. 그 정도로 그 상처는 컸다.
희생자가 특히 많았던 것은 중립적인 공권력의 부재에도 기인했다. 미군정과 이승만 정권은 중재자의 입장에 서지 않고 한쪽을 노골적으로 대변했다. 공권력의 이런 태도로 인해 저항의 수준은 한층 높아지고, 공권력의 폭력으로 인한 희생의 규모도 그만큼 커졌다.
희생자가 주로 저항자 대열에서만 나온 것은 아니다. 정치적 갈등과 거리를 둔 사람들에게서 훨씬 많이 나왔다. 일례로, 여순사건특별법 제2조 제1호는 여순항쟁을 "여수·순천 지역을 비롯하여 전라남도, 전북특별자치도, 경상남도 일부 지역에서 발생한 혼란과 무력충돌 및 이의 진압 과정에서 다수의 민간인이 희생된 사건"으로 정의한다. 무력충돌에 참여한 저항세력뿐 아니라 "다수의 민간인"도 뜻밖의 희생을 당했다.
두 아들을 죽인 원수를 용서하다
여수 애양원교회의 손양원(1902~1950) 목사는 다소 특별한 경로로 참변을 겪었다. 정부수립 직후인 1948년 10월 19일 발생한 여순항쟁(여순사건)으로 인해 그는 순천에서 학교를 다니던 손동인·손동신 두 아들을 잃었다. 두 아들은 저항자나 진압군은 아니었다. 이들은 저항군에 의해 목숨을 잃었다. 1974년 12월 3일 자 <경향신문> '종교백년' 제80회는 이렇게 서술한다.
"고등학교에 다니던 손양원 목사의 두 아들 동인·동신 군이 좌익계 학생들에게 붙잡혀 총살당했다. 안재선이란 좌익계 학생이 예수를 믿지 않겠다고 말하지 않으면 쏴 죽이겠다고 했으나, 이 두 형제는 '너희들의 죄를 회개하고 예수를 믿으라'고 외치다가 차례로 숨졌다. 10월 21일의 일이다."
여순항쟁은 4·3과 마찬가지로 민족분단을 거부하는 싸움이었다. 이런 항쟁에 나선 사람들이 친미세력의 혐의가 있다는 이유로 일부 기독교인들을 희생시킨 것은 잘못이다. 그런데 이 일을 대하는 손양원의 반응은 주변 사람들에게 놀라움을 안겼다. 전기작가 오병학의 <손양원>은 두 아들을 잃은 아버지의 심경을 이렇게 정리했다.
"아무리 내 아들들을 죽인 원수라 해도 나의 동족이요 골육이 아닌가. 이런 어지러운 국난을 만나서 그도 별수 없이 희생자가 되고 만 것이 아닌가. 이런 판국에 서로 복수한답시고 이놈 잡아 죽이고 저놈 잡아 죽이는 일에만 팔려 다닌다면 도대체 우리 동포 가운데 살아남을 자가 어디 있겠는가."
이런 생각을 실천하기 위해 그는 순천의 한 목사에게 편지를 썼다. <손양원>에 따르면, 이런 내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