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피해자 국선변호사로서 배당받은 사건을 수행하느라 정신이 없다. 피해자 상담 후 경찰에 제출할 의견서를 작성하기 위해 피해자가 정리한 사건 경위에 대한 내용들, 피해자가 진술한 진술 조서를 꼼꼼히 살펴 증거가 될 만한 것이 무엇이 있을지 고민하여 피해자에게 이것저것 챙겨오라고 이야기한다. 이 사건과 유사한 판례가 있는지도 살펴본다.
피해자는 정신적 피해가 심각하여 매사 불안하여 내게 묻는 것이 많다. 조금 피곤하지만, 그래도 성폭력 피해를 입은 피해자의 불안감을 십분 이해하므로 최대한 성실히 답변해 주고 지지가 되는 이야기도 많이 해준다.
갑자기 어느 성폭력 피해자 지원기관으로부터 전화가 온다. 기관에 접수된 피해 건이 있는데, 상담 후 사건 수행을 해줄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이미 고소는 이루어져 수사기관에 사건이 접수된 상태라고 한다. 그러면 피해자 국선변호사가 선정되어 있지 않느냐고 물었는데, 피해자 국선변호사가 있긴 한데 연락도 잘 안되고 조력을 잘 받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라고 한다. 자주 듣는 이야기라서 놀랍지는 않다.
점심에는 동료 변호사들을 만나 피해자 국선변호사 활동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처음에 몇 건 수행하고 '현타'가 와서 그 이후로는 더 이상 안 한다는 변호사, 꽤 오래 활동을 했는데 이제 더는 못 하겠다고 했다.
한쪽에는 열심히 일하는 피해자 국선변호사가 있는 반면, 다른 한쪽에는 피해자 국선변호사로부터 온전히 조력 받지 못하는 피해자가 있다. 피해자 국선변호사로 활동하던 동료들은 떠나고 있다. 피해자 국선변호사 제도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일까?
피해자 국선변호사의 중요성
2013년 도입된 피해자 국선변호사 제도는 성폭력·아동학대·장애인학대·인신매매·스토킹범죄 피해자 및 성매매 피해아동·청소년을 위하여 국가가 변호사를 선임해주는 제도이다. 피해자국선변호사는 사건 발생 직후 수사단계뿐 아니라 이후 기소되어 재판이 진행되는 경우 재판 절차까지 전 과정에서 피해자를 위한 전문적인 법률지원을 한다.
왜 성폭력 피해자에게 국가가 나서서 변호사를 선정해 주는 걸까? 성폭력은 다른 범죄와 다른 몇 가지 특성들이 있다. 일단 피해자에게 정신적으로 크나큰 상흔을 남긴다, 물리적인 피해를 입는 경우도 있고 무엇보다 인격적으로 무너진다. 이로 인해 공황장애, 불안장애, 심한 경우 외상후스트레스장애까지 앓게 되는 등 평소 누리던 일상이 무너지는 등 그 피해의 깊이가 상당하다.
한편으로, 성폭력 범죄는 수사는 물론이고 재판에 이르기까지 피해자의 진술이 너무나 중요하다. 은밀히 이루어지는 성폭력 범죄의 특성상 명백한 물증이 없는 경우가 많아 피해자 진술이 유일한 증거인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우리 대법원은 성폭력 피해자의 진술이 유일한 증거인 경우에도 가해자를 처벌한다. 단 피해자 진술의 신빙성이 인정되어야 한다. 진술의 구체성과 일관성, 합리성, 객관적으로 드러난 정황과 일치될 것, 무고의 동기가 없을 것 등등이 피해자 진술의 신빙성 판단 기준이다.
즉, 꼭 진술해야 할 내용, 자세히 진술해야 할 내용, 별로 중요하지 않은 내용 등을 잘 구분하여 진술해야 하는데, 변호사 조력이 없다면 무엇이 중요한지 모른 채 진술하여 꼭 진술해야 하는 사항임에도 빠트린다거나 간접적으로 도움이 될 만한 자료들을 제출하지 못하거나 하는 일이 벌어질 수 있다. 피해자 국선변호사는 범죄 피해를 진술할 때 어느 부분을 자세히 이야기하고, 어느 부분을 꼭 이야기해야 하는지 등을 조언해 주고, 피해자의 진술을 법률적으로 재구성하여 보충해 줄 수 있다.
피해자 국선변호사는 수사나 재판 과정에서 피해자에게 심리적 안정감을 주고 불필요한 2차 피해를 방지하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피해자 진술조사 시 동석하여 피해자의 심리적 안정을 돕고, 조사 과정에서 가해자에게 이입하여 피해자에게 2차가해성 발언을 하는 수사관이 있다면, 적절히 이의를 제기하고 심하다면 수사관 교체 신청을 통해 적정한 수사관으로 바꿀 수도 있다.
재판 과정에서도 피해자 국선변호사의 역할은 중요하다. 일단 가해자가 범행을 부인하는 경우, 피해자는 증인으로서 재판에 출석하여 진술해야 하는데, 이때에도 피해자 국선변호사가 동석하여 낯선 재판에 나온 피해자의 심리적 안정을 도울 뿐만 아니라, 가해자 변호인의 부적절한 질문들을 적절히 제지할 수도 있다.
또한, 가해자인 피고인의 출석이 의무인 형사절차의 특성상 피해자는 재판 과정이 궁금해도 가해자의 얼굴을 직접 마주하는 두려움 때문에 재판을 보러 가기 어려운데 피해자 국선변호사가 있다면 피해자를 대신해 재판에 출석하여 진행 경과를 확인하고 필요한 경우 피해자의 의견을 진술해 줄 수도 있다.
이렇게 성폭력 피해자들은 자신의 비용으로 변호사를 선임하지 않고도 피해자 국선변호사로부터 필요한 법률조력을 받을 수 있다. 그런데 왜 현실은 충분한 조력은커녕 피해자 국선변호사와 연락도 잘되지 않는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