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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 대통령 영일만 석유 발표 모습, 어디서 봤나 했더니
2024-06-07 20:13:31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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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열 대통령은 지난 3일 국정브리핑에서 "포항 영일만 앞바다에서 막대한 양의 석유와 가스가 매장돼 있을 가능성이 높다는 물리 탐사 결과가 나왔습니다"고 말해 산유국의 희망을 띄웠다. 뒤이어 미국 액트지오사의 비토르 아브레우 대표가 입국해 7일 기자회견에서 "상당한 매장량이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고 발언해 윤 대통령의 발언에 힘을 실어줬다.

1976년 1월 15일 연두기자회견 때 박정희 대통령도 윤 대통령과 비슷한 보고를 했다. 그는 "작년 12월 초 우리나라 영일만 부근에서 처음으로 석유가 나온 것은 사실"이라고 말해 국민들을 흥분시켰다. 차이점이 있다면 윤 대통령처럼 '막대한' 같은 표현은 쓰지 않았다는 점이다. 박정희는 "나온 양은 소량이나, 처음으로 지하 1천 5백m에서 석유가 발견된 것은 사실"이라며 다소 조심스레 접근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왜?

별 성과 없이 해프닝으로 끝났지만, 한국의 초창기 대륙붕 개발은 인류 역사의 새로운 변화와 맞닿는 사안이었다. 자원을 향한 인류의 경쟁 무대가 육지에서 해저로 옮아가는 현상을 반영했다.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아프리카 국가들을 식민지배의 나락으로 몰아넣은 제국주의 국가들의 경쟁은 이 지역의 육상 자원을 놓고 전개됐다. 제국주의는 아시아·아프리카의 육상을 자신들을 위한 원료 공급지로 변화시켰다.

그런 경쟁은 식민지의 저항을 초래하는 것은 물론이고 제국주의 상호간의 두 차례 세계대전까지 불러일으켰다. 이로 인해 상당한 출혈이 발생하고 육상 자원의 착취도 어느 정도 궤도에 올라가자, 인류의 시선은 육상에서 해저로 옮겨갔다. 제2차 대전 종식 직후의 '트루먼 선언'이 이 변화를 상징적으로 보여줬다.

1947년 3월 12일의 '트루먼 독트린' 발표로 동·서 냉전의 경계를 만들어낼 해리 트루먼 미국 대통령은 1945년 9월 28에는 육상과 해저의 경계를 허무는 트루먼 선언을 발표했다. '대륙붕의 지하 및 해저의 천연자원에 관한 미합중국의 정책(대통령 선언 2667)'으로 명명된 이 선언은 미국 연안에 인접한 수심 183미터까지의 대륙붕 자원에 대한 미국의 관할권을 천명했다.

신흥 최강국에서 나온 이 선언은 곧바로 새로운 흐름을 만들어냈다. 선언 직후인 1945년 10월 25일 멕시코가 동일 선언을 하고, 이로부터 9년 내에 파나마·아르헨티나·칠레·페루·과테말라·코스타리카·필리핀·온두라스·엘살바도르·니카라과·에콰도르·브라질·파키스탄·호주·인도와 더불어 한국 등이 뒤를 이었다. 이 흐름은 1958년 4월 29일 제1차 국제연합 해양법회의에서 대륙붕조약이 채택되고 1964년 6월 10일 조약이 발효되는 결과로 연결됐다.

위에서 언급됐듯이, 한국도 이 흐름에 가세했다. 한국전쟁 중인 1952년 1월 18일 이승만 대통령이 선언한 평화선 혹은 이승만 라인은 독도 동쪽에 한·일 경계선을 긋는 기능을 했을 뿐 아니라 동해 대륙붕에 대한 권리를 선언하는 기능도 함께 했다. 이 선언은 "한반도 및 도서의 해안에 인접한 해양의 상하 및 내(內)에 존재하는 모든 자연자원 및 재부"에 대한 주권적 권리의 천명이었다.

대륙붕 개발에 대한 관심이 한국 내에서 확산되는 가운데, 1959년에는 국립지질조사소에 의해 전남 해남군 우황리 일대에서 석유 탐사가 실시됐다. 이것이 한국 최초의 석유 탐사다. 우황리에 대한 관심은 한동안 이어졌다. 1961년 10월 29일자 <동아일보> '우리나라서도 석유 생산되나'에는 이 해에 진행된 석유 탐사 작업이 보도됐다.

1961년 5·16 쿠데타로 등장한 박정희 정권은 일본과의 현안 해결에 의욕을 냈다. 그 현안에는 독도 영유권과 어업협정이 포함됐다. 이는 해양 자원에 대한 박 정권의 관심을 한층 자극하는 원인이 됐다.

1964년부터는 이번에 윤 대통령이 거론한 포항 인근에 대한 탐사가 시작돼 1977년까지 이어졌다. 1970년 1월 1일에는 해저광물자원개발법이 제정되고 대륙붕 석유 탐사가 본격화됐다. 동년 5월 30일에는 해저광구를 일곱 개로 설정하는 이 법 시행령이 제정됐다.

이 시행령은 서해에서부터 제주 남서쪽까지에 제1~제4광구를, 제주 남방에 제5광구를, 남해안 동부및 동해에 제6광구를 설정한 데 이어, 오키나와열도 코앞에 제7광구를 설정했다. 이는 중동 산유국을 동경하는 이 나라에서 '우리도 산유국이 될 수 있다'는 기대감을 퍼트렸다.

일본의 이해관계도 함께 걸린 제7광구 설정은 한국의 석유·가스 개발에 일본도 관련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1974년 1월 30일 한일대륙붕협정이 체결되고 4년 뒤 6월 22일 발효된 것은 이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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