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강점기 가장 통쾌한 의열투쟁은 안중근의사의 이토처단, 윤봉길의사의 사라기와 처단, 그리고 김상옥의사가 단신으로 왜경 400명과 서울 한복판에서 시가전을 벌인 투쟁이 아닐까 싶다.
1923년 1월 12일 저녁 8시경, 서울 종로경찰서에 폭탄이 떨어졌다. 폭탄의 성능이 약했던지 크게 폭파하지는 않았으나 유리창이 깨지고, 건물 앞을 지나던 기자 등 7명이 파편에 맞아 부상을 입는 등 총독부는 혼비백산이 되었다. 투탄자가 누구인지, 행방이 묘연하였다.
서울의 한 복판에 자리잡은 종로경찰서는 독립운동가들에게는 총독부에 버금가는 원부였다. 황포탄 의거의 일원인 김익상을 잡아다 사형한 것도 그곳이었다. 의열단으로서는 마땅히 파괴해야 할 대상이었다. 3·1혁명 후 총독으로 부임한 사이토는 이른바 '문화정책'의 미명하에 무단통치를 자행하고, 만세시위로 수감된 시민·학생들을 가혹하게 고문하여 한층 악명을 날렸다.
종로경찰서 투탄은 의열단과 임시정부의 합작품이었다. 임시정부 요인 이시영·이동휘·김구·조소앙 등은 1922년 11월 중순 조선총독과 고관을 암살하고 중요 기관을 폭파할 계획을 세웠다. 적임자로 의열단원 김상옥과 안흥한이 선정되었다. 스스로 지원한 것이다.
김상옥은 1890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 홀어머니 밑에서 어렵게 자랐다. 집이 가난하여 제대로 공부를 하지 못하였지만 심지가 곧고 의협심이 강하여 청년시절부터 대한광복단에 들어가 활동하고, 3·1혁명 때는 손수 태극기를 만들어 북한산 정상에 꽂는 등 항일운동을 벌였다.
김상옥은 탄압을 피해 중국으로 망명하여 베이징과 상하이에서 독립운동가들을 두루 만났다. 특히 김원봉의 항일정신에 감명을 받고 의열단에 가입하였다. 독립운동을 하기 위해서는 자금이 필요하다는 것을 인식하고 국내로 들어오면서, 거사용으로 의열단에서 준비한 권총 3정과 실탄 500발, 살포용 <의열단선언>을 휴대하고 1922년 겨울 꽁꽁 얼어붙은 압록강을 밤중에 걸어서 건넜다.
그리고 경의선 간이역에서 석탄수송차에 몸을 숨기고 12월 1일 일산역에서 하차, 서울로 잠입하는데 성공하였다. 거사용 폭탄은 의열단원을 통해 별도로 전달받기로 약조되었다.
김상옥은 총독 사이토가 업무차 도쿄로 간다는 정보를 알아냈다. 이것을 하늘이 준 기회로 삼고 그가 기차를 타게되는 서울역을 은밀히 답사하며 거사의 기회를 노렸다. 1월 17일 저녁, 이날도 서울역사와 주변을 돌아보고 은신처에서 막 잠이들려고 할 때 문틈으로 내다보니 일본 경찰이 떼지어 집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뒤늦게 종로경찰서 투탄자가 김상옥임을 파악한 일제가 경찰을 풀어 그의 행적을 뒤쫓아 은신처를 포위하기에 이른 것이다. 김상옥은 망설이지 않았다. 권총을 뽑아 맨 앞에 온 자를 쏘았다. 종로경찰서 형사 다무라였다. 이어서 종로서의 이마세 경부, 동대문서의 우메다 경부가 차례로 총탄에 맞아 쓰러졌다. 종로서 투탄사건이 일어난지 5일만의 일이다. 전체 내용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