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엄령이 선포되던 12월 3일, 저는 국회에 갈 수 있는 거리였는데도 가지 않았고, 새벽 내내 라이브를 보며 부끄러워했거든요." (여채현, 21, 대학생)
"(라이브 방송) 스트리밍을 틀어 놓고 잤다가 아침에 눈 뜨자마자 화면을 확인했어요. 화면 속에 계속 똑같은 사람이 더 빨개진 손으로 응원봉을 흔들고 계시더라고요. 그 순간에 진짜 마음이 너무 힘들어졌던 거 같아요." (이은비, 43, 킨츠기 공예가)
"친구가 거기 있다는 거예요. 그래서 그냥 '그래. 너한테 내가 핫팩 갖다주러 갈게' 하는 마음으로 갔거든요." (조단원, 32, 개발자)
"누구 트윗 마냥 제가 뭐 대단한 민주시민이어서 가는 게 아니고요. 말벌 아저씨처럼 몸이 움직이는 거더라구요." (정금(활동명‧40), 콜센터 상담원)
지난 17일부터 시작된 전국농민회총연합(전농)‧전국여성농민회총연합(전여농)의 트랙터 대행진이 21일 서울 남태령역에서 멈췄다. 서울 진입 직전에 경찰이 '교통 혼잡'을 이유로 차벽을 세워 막아섰기 때문이다. 소셜 미디어 등을 보고 몰려든 3만 여명(주최 측 추산)의 시민들은 "차 빼라"를 연호하며 혹한에 트랙터의 곁을 지켰고, 무박 2일의 대치 끝 경찰은 길을 열었다. 이름하여 '남태령 대첩'.
이틀 뒤인 24일, 남태령 대첩에 참가했던 15명의 여성과 퀴어를 인터뷰했다. 대학생, 취업준비생, 콜센터 상담원, 개발자, 공예가, 프리랜서, 예비 교사 등등 각자의 처지와 나이는 달랐지만 오직 '연대하기 위해' 추운 겨울 자리를 지켰던 이들이다. 그곳에서 난생처음 경찰과 대거리를 하고, 관우의 청룡언월도처럼 생긴 큰 칼 모양의 LED 봉을 높이 들고, 시민 발언에 나섰던 사람들에게 그곳에 갔던 이유를 물어봤다.
부끄러움과 죄책감 때문에… 그곳에 갔다
상당수 여성들이 남태령행을 두고 '죄책감', '부끄러움'을 언급했다. 프리랜서로 활동하는 레즈비언 여성 요술봉(활동명·40)은 "12월 3일 계엄 터졌을 때 국회에 못 간 게 마음에 걸려서, 빚졌다는 생각이 자꾸 들어서"라고 했다. 그들에게는 윤석열 대통령의 계엄 선포 당시 국회를 지킨 시민들에 대한 고마움, 이어진 탄핵 집회들에 모두 참여하지는 못한 데서 오는 미안함이 컸다.
계엄 선포에 아비규환이었던 국회를 지켜봤던 이들에게는 이른바 '학습 효과'라는 것이 생겼다.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기 때문에 가서 자리를, 사람들을 지켜야겠다는 생각이었다. 주중에는 콜센터 상담 업무로 바빠 대신 주말 집회에 꼬박꼬박 참석하는 정금은 그날도 광화문 집회에 갔다 집으로 가는 길에 누군가의 '트윗'을 봤다.
"'시민들이 오니까 경찰이 폭력적으로 굴지 못하는 것 같으니 남태령으로 와주세요' 라는 트윗을 보고 무작정 4호선을 타고 내려갔습니다. 그냥 그분들 지켜야겠다는 마음밖에는 없었어요."
22일 오전 1시, 물결(가명‧21)도 정금과 비슷한 마음으로 남태령으로 가는 버스 막차에 올랐다.
"계엄 때 나가지 못했다는 일종의 부채감이 있기도 했고, 그때의 경험으로 밤새 무슨 일이 일어날까 봐, 그걸 막지 못할까 봐 걱정이 많이 됐습니다. 어차피 걱정돼서 잠들지 못할 거라면 현장에 있는 게 차라리 속이 편해서…"
혹한 속 기운을 잃어가는 '남태령 사람들'에 대한 연민은 '교대'를 해줘야겠다는 마음으로 이어졌다. 22일 오전 7시 첫차를 타고 남태령에 도착한 대학생 조보리(가명‧23)는 밤새 전농TV의 라이브 스트리밍 방송을 지켜본 이들 중 하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