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로 가는 녹동항이 분주하다. 오가는 배 사이로 지척인 소록도가, 바다보다 더 짙푸르다. 저 섬에 갇힌 한과 멸시, 저항과 의지로 피어난 삶에 대한 열망은 얼마였던가? 소설가 이청준이 <당신들의 천국>에서 그린 모습마저 저 섬이 겪은 아픔과 슬픔의 소소한 부분에 불과할지 모른다.
소록도 남쪽의 제법 큰 섬 거금도가 득량만을 향해 헤엄친다. 녹동항에서부터 바다를 가르는 다리로 연결되어 있어 섬인 듯 모호하기만 하다. 거금도 옛 이름이 절이도다. 折爾(절이)는 무슨 의미일까? 뭔가 꺾겠다는 의지만은 분명해 보인다.
이 섬에 녹도진 휘하 '도양목장' 중 하나로 말을 기르는 성(금산면 어전리∼석정리)을 쌓았다. 돌로 쌓은 말 목장이라는데 가치가 있다. 남쪽으로 열린 높은 적대봉과 용두봉 사이 계곡과 능선을 이어 길게 쌓은 성이다. 완만한 서쪽 구릉에서 시작되어 남쪽 끝 해안선까지 이어진 성벽은 그리 높지 않다.
조선 시대 말 목장은 주로 섬에 두었다. 서남해안 섬들이 목장으로 활용되었다. 대표적인 곳이 부산 영도다. 영도 본이름은 절영도로, 여기서 기르는 모든 말이 명마로 하도 빠르게 달려 '그림자가 잘려 나갈(絶影)' 정도라는 데서 섬 이름이 유래했다.
전라 좌·우수영에도 말 목장이 있었다. 우수영은 진도에, 좌수영은 절이도와 여수 화양면 끝자락에 목장을 두었다. 목장은 좌수영에서 큰 비중을 두어 관리했을 개연성이 높다.
절이도에 목장 성을 쌓은 연유가 세조실록(1466.02.17)에 자세하다. 전라도 점마별감(말을 점검하는 사복시 별감) 박식이 아뢰기를 "도내의 흥양 절이도는 주위가 2백 70리인데, 물과 풀이 모두 풍족하여 말 8백여 필을 방목할 수 있습니다. 청컨대 회령포·금갑포·돌산포·남도포·어란포 등 여러 포구의 선군(船軍) 하여금 (성을) 수축하게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고 기록한다.
이 목장에 364필을 방목(1470)했다니 상당히 활발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성 길이는 북쪽 미확인 유적을 제외하고 4652m이다. 너비는 하부 3.2m, 상부는 1.4m다. 3단의 성벽 1단은 넓게 막쌓기를, 2단은 넓적한 돌로 열을 맞춰서, 3단은 정연하게 쌓은 계단식이다. 하지만 지금 목장 성은 수풀에 휘감기고 곳곳이 무너져 내렸다. 그나마 온전한 성벽도 위태해 보인다.
정유재란, 이곳 거금도에서 벌어진 '절이도해전'은 명나라 도독 진린이 이순신 장군을 인정하는 계기가 된다. 난중일기는 유실되었으나, 선조실록엔 자세하다. 순천 왜교성에 쥐처럼 웅크린 고니시 유키나가를 잡으려는 전쟁을, 실록과 난중일기를 바탕으로 재구성해 보았다.
정유재란
<무술년(1598) 칠월 열흘>
정유재란은 순전히 전라도가 목적이다. 임진년 실패가, 전라도를 뺏지 못한 데에 있다는 것이다. 정유년 7월 칠천량에서 우리 수군은 궤멸적 타격을 입었다. 원통한 일이다.
왜놈들이 조선 백성을 보기만 하면 죽였다. 코와 귀를 베어가는 만행도 모자라, 잡아다 노예로 팔기도 했다. 정유년 8월 남원과 전주를 점령하고, 9월 충청도 직산에서 패해 남하했다. 9월 16일, 명량에서 나는 왜놈들을 격살시켰다. 신고를 다 했지만 천행이었다. 전체 내용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