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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나키스트 독립운동가 단주 유림평전] 독재타도에 성공한 4월혁명
2024-11-09 18:10:23
김삼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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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천여 년 지속된 왕조체제에서 피지배 민중이 지배자를 타도하고 역사의 주역이 된 것은 1960년 4·19혁명이 처음이었다. 우리나라 역사는 왕조창업, 반정반란, 민란, 쿠데타, 유신정변 등 여러 가지 정치 변혁이 있었으나 '성공한 혁명'은 한 번도 없었다.

전봉준 등의 동학농민혁명과 1919년 3·1독립혁명은 좌절된 혁명이었다. 이런 의미에서 4월혁명의 가치는 아무리 강조해도 모자라지 않는 학생·시민혁명이다.

1960년 4월의 민주혁명은 3·15부정선거에 대한 저항으로부터 발화되었다. 마산에서 일기 시작한 부정선거 규탄의 시민·학생시위는 쉽게 서울과 부산·대구·광주·목포·청주 등 대도시로 번졌다.

'피의 화요일'로 불린 4월 19일 고교·대학생을 비롯, 10만여 명의 서울시민이 시위에 참가, 시위대의 일부가 경무대로 향하는 한편, 서울신문사와 반공회관·경찰서 등에 불을 지르고 부정선거를 규탄했다. 지방도시에서도 수십만 명의 시민·학생들이 부정선거 규탄과 함께 이승만 정권 타도의 시위를 벌였다. 시위는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경찰의 무차별 발포로 서울에서만 이날 104명, 부산에서 19명, 광주에서 8명 등 전국적으로 186명이 사망하고, 6,260명이 부상당했다. 희생자는 하층 노동자 61명, 고등학생 36명, 무직자 33명, 대학생 22명, 초등학생과 중학생 19명, 회사원 10명, 기타 5명 등이었다. 희생자 규모로 보아 국민혁명의 성격을 띠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경찰이 시위대에 발포하기 시작한 직후 서울 등 주요 도시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육군참모총장 송요찬 중장을 계엄사령관에 임명했다. 그러나 서울 시내에 진입한 군대는 경찰의 유혈사태를 방지하고 일부 과격분자들의 파괴방지에 전념하면서 중립적인 태도를 견지했다. 이승만 정권에 대한 민심의 이반현상이 워낙 강했기 때문이다.

이승만은 자유당 총재직을 사퇴하는 등 일련의 모션을 취하면서 사태를 미봉하고 계속해서 정권을 유지하고자 시도했다. 그러나 이미 혁명적인 열기에 휩싸인 민중은 이승만의 하야를 요구하기 시작했다. 4월 26일의 시위는 정국에 새로운 물결을 일으켰다. 그동안 침묵했던 일부 대학교수들이 시국수습을 위한 선언문을 발표하고 시위에 나선 것이다.

4월 25일 오후 3시 서울대학교 교수회관에 모인 27개 대학교수 258명은 "대통령을 위시한 여야 국회의원들과 대법관 등은 3·15부정선거와 4·19사태의 책임을 지고 물러나는 동시에 재선거를 실시하라"는 요지의 14개항 시국선언문을 발표했다.

이어 교수들은 〈4·19의거로 쓰러진 학생의 피에 보답하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계엄하에서 평화적인 시위를 감행, 서울시가를 행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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