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말 국권침탈기 민족운동의 요람이라면 서울 남대문안 상동거리에 있는 상동교회와 주임목사 전덕기(全德基, 1875~1914)일 것이다. 안창호·양기탁·이동휘·신채호·이회영·이상설·김구 등이 국권회복을 목적으로 비밀결사 신민회가 이곳에서 조직되고, 헤이그특사 파견도 여기서 싹이 텄다.
전덕기는 아버지 전한규와 어머니 임씨 사이에 서울 정동에서 태어났다. 불운하여 9세 때 부모가 모두 별세하여 고아가 되었고, 숯 장사를 하는 숙부 집에 들어가 성장하였다. 숙부의 직업으로 보아 하층 계급의 출신으로 추정된다.
17세 되는 1892년 미국 감리교회 선교사 스크랜턴을 찾아갔다. 신앙적인 것이 아니라 생계의 목적으로 선교사가 되고자 해서였다. 준수한 용모와 성실해 보이는 태도에 그는 자기집 고용인으로 채용하였다. 이것이 그의 생애를 가름하는 계기가 되었다. 4년 후 그는 스크랜턴의 신임을 받아 세례를 받고 기독교인이 되었다. 1896년 22세 때이다.
전덕기는 1898년 상동교회 속장이 되어 평신도 지도자로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하였다. 이때 교회 안에 엡윗청년회를 조직, 민주적 민족운동을 전개하는 한편 대외적으로는 독립협회 회원으로 활동하기도 하였다. 1899년에는 교회 안에 설립된 공옥(功玉) 학교 교장이 되어 주로 불우한 형편에 있던 청소년들을 모아 가르치기 시작했다. 1901년 평신도로서 설교할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지는 권사직을 받았고 1902년에는 미감리교회 조선연회에서 전도사로 임명받아 목회자로서의 활동을 시작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