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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직하고 똑똑한 아들을 염려한 아버지의 유언
2025-01-10 19:17:05
이재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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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진 고문으로 내 몸은 말이 아니었다. 그놈들이 달아매고 때릴 때는 박태보가 불에 달군 쇠로 몸을 지지는 형벌을 당하면서 "이 쇠가 식었으니 다시 달구어 오너라"고 하던 구절을 외웠다."

백범 김구가 쓴 <백범일지>에 나오는 한 대목이다. 청년 시절 서대문감옥에 갇혔던 김구는 조선 숙종 때의 의인(義人) 박태보에게 '빙의'라도 된 듯, 여덟 번의 가혹한 고문을 견디고 참아냈다.

김구가 그렇게 존중했던 박태보(朴泰輔)는 이번 이야기의 주인공인 조선 후기 실학자 서계(西溪) 박세당(朴世堂: 1629~1703)의 아들이다.

강직한 부자, 박세당과 박태보


서인의 소론계 영수 중 한 명이었으며 '사문난적'(斯文亂賊: 주자 해석에 벗어난 학설을 펼치는 사람에 대한 멸칭)으로까지 몰렸던 박세당은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개인사로, 가족사로 보여준 조선의 대표적인 비판적 지식인이었다.

그의 아들 박태보는 인현왕후의 폐위를 반대하다 모진 고문을 당한 뒤 유배를 가던 도중 노량진에서 사망했다. 선비 80여 명을 대표해서 직언(直言)으로 항거하는 상소문을 올려 임금을 능멸했다는 죄로 숙종이 그를 친국했다.


그 과정에서 박태보는 불에 달군 쇠로 몸을 지지는 형벌인 낙형(烙刑)에다 사금파리 더미 위에 꿇어앉힌 뒤 무릎을 바위로 짓이기는 압슬(壓膝)형까지 당했다. 박태보의 죽음을 기록한 숙종실록의 졸기(卒記)에는 "고문이 참혹하여 몸이 모두 문드러졌으나, 정신은 끝내 흐트러지지 아니하였다"고 나와 있다.

안진경체(당나라 명필 안진경의 서체)의 대가였던 첫째 아들 박태유가 죽고 나서 3년 뒤 둘째 아들 박태보마저 세상을 떠나자 아버지 박세당은 극도의 정신적 공황 상태를 겪게 된다.


박세당이 벼슬을 버리고 양주 석천동(石泉洞, 지금의 의정부 장암동) 수락산 계곡 자락 아래에 기거하던 61세 때의 일이다.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이 펴낸 <박세당의 서계유묵>이라는 책은 태유·태보 형제를 이렇게 평가하고 있다.

"비록 이들 형제는 정쟁에 휘말려 젊은 나이에 삶을 마감했지만 '안진경체'를 유행시킴으로써 한국 서예사에 커다란 업적을 남겼다. 당시 조선은 조맹부의 송설체(松雪體)가 주류를 이루었는데, 태유·태보 형제는 이러한 서풍을 일신시키는데 기여하였다."

박태보의 의로운 죽음은 박세당 집안과 대척점에 서 있던 '노론계 거두' 송시열의 마음까지 움직였다. 제주에서 유배 중이던 송시열은 박태보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눈물을 흘리며 자손들에게 '박태보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말라'고 경계했다. (숙종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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