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아빠는 시멘트 위에서 고통스럽고 비참하게 죽었는데, (책임자가) 낮은 처벌을 받게 되면 아빠의 죽음이 너무 허망하고 초라해진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뭐라도 해야겠구나. 유가족이 왜 길거리에 나오는지 알게 됐어요."
수원에 사는 혜연씨는 매일 아침 서울서부지방법원으로 향한다. 지난 2024년 12월 23일부터 '사랑하는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엄중 처벌. 안전한 일터'가 적힌 피켓을 들고 1인 시위를 시작했기 때문이다. 혜연씨의 아버지 문유식님은 건설 현장에서 일하는 미장공이었다. 평소처럼 장비를 챙겨 집을 나섰던 2024년 1월 22일, 문유식님은 이동식 비계에서 추락해 병원으로 이송되었다. "오늘 버텨줘서 고마워. 내일도 조금만 버텨줘. 내 옆에 더 있어 줘." 혜연씨의 간절한 바람에도 아버지는 끝내 의식을 되찾지 못하고 29일 사망했다.
처음에는 눈물을 쏟으며 슬픔에 젖어있던 혜연씨는 곧 정신을 차려야겠다며 마음을 다잡았다. 억울한 죽음이 되지 않도록 하는 게 자녀로서 도리라고 생각했다. "제가 아빠랑 똑같이 생겼어요. 밥을 같이 먹으면 한참 쳐다봐요. 자기랑 똑같은 여자아이가 있으니까. 예뻐하시는 게 눈으로 보였죠. 아버지의 사랑을 깊고 넓게 받아서, 받은 게 너무 많아서. 슬퍼만 하면 안 되겠다, 이제는 내가 보호자로서 역할을 해야겠다 싶었죠."
하지만 산업재해에 대해서 잘 몰랐고, 무엇을 해야 할지 막막했다. 그때, 친구를 통해 김용균재단의 '산재 사망사고 유가족을 위한 안내서'를 받았다. 안내서를 통해 사고조사가 객관적으로 이루어지지 않고 회사의 주장만 담길 수도 있다는 걸, 재판까지의 과정에서 유가족이 배제된다는 걸 알게 되었다. 혜연씨는 경찰, 고용노동부, 근로복지공단, 국립과학수사연구원까지 이곳저곳 문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산재 전문 변호사를 소개받고 함께 고용노동부에 갔을 때, 그제야 사고 원인을 알게 되었다.
안전조치 없어 발생한 사고, 회사는 뒤에서 증거 조작
"사진을 보니까 바닥이 평평하지 않았어요. 바퀴가 있는데 다 녹슬어서, 저게 안 굴러갔을까 싶은 정도더라고요. 안전모는 지급조차 안 했다고 하고요. 명백히 회사의 잘못인데, 왜 아무 말도 없지? 화가 나더라고요."
그전까지 인우종합건설은 문자로 유감을 표했을 뿐, 문유식님이 입원 중일 때 병원에 찾아와 사과하거나 사고가 왜, 어떻게 발생했는지 이야기하지 않았다. 혜연씨는 인우종합건설에 '제대로 된 사과, 사고 경위 설명'을 요구했다. 그러자 회사는 A4용지 한 장으로 답했다. '한파, 추위로 인한 낙상 또는 넘어짐.' 안전모를 지급하지 않고 안전난간을 설치하지 않았던 회사의 잘못은 한 줄도 적혀있지 않았다.
인우종합건설은 오히려 뒤에서 증거를 조작하려 했다. 노동자들에게 회사가 안전모를 지급했고 안전교육을 실시했다는 서명을 받고 있었던 것이다. "아버지와 30년간 같이 일한 동료에게 '안전모를 받았는데 안 썼다고 해달라. 점심시간이 다 되어서 혼자 벗고 올라간 거라고 해라. (임금이 다르니까) 미장공이 아니라 보조공으로 일했다고 해달라' 했더라고요. 동료분도 종이 내밀길래 그냥 사인했는데, 안전모와 안전교육 관련 서류인 걸 뒤늦게 알았대요." 심지어 증거를 조작하던 이때는 문유식님이 아직 세상을 떠나기 전이었다. 결국 회사는 지난 1심 공판에서 모든 혐의를 인정했는데, 혜연씨는 회사가 반성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할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