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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원에 안치된 시신이 살아났다, 말문 막힌 의료진
2025-01-16 17:53:42
김상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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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로부터 사람들은 죽은 자가 되돌아올지 모른다는 두려움과 함께 원치 않은 이별을 향한 안타까움이란 이중적 감정을 공유해 왔다. 당연히 이를 소재로 숱한 창작이 이뤄짐은 당연지사.

끊임없이 망자는 다양한 형태로 귀환하고, 남은 자들은 이 자연법칙을 위배한 상황에 전전긍긍한다. 되돌아온 죽은 자, 즉 '언데드'는 현대 대중문화 전반에 깃든 상징들, '흡혈귀'나 '좀비', '강시' 등으로 분화되어 상상력의 마르지 않는 원천으로 분화된다. 북유럽에서 찾아온 <언데드 다루는 법>은 그런 영향의 최신판이다.

사랑하던 이들이 무덤에서 돌아온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북구의 땅 노르웨이에도 여름은 짧지만 무덥다. 요즘 들어 전기 누수와 합선이 잦아 그렇지 않아도 견디기 힘든 시기를 더욱 짜증 나게 만들던 참이다. 공공 서비스의 부실을 탓하며 여론의 성토가 벌어져도 하등 이상할 것 없는 상황. 갑자기 원인을 알 수 없는 정전이 수도 오슬로 전역에 발생한다. 다행히 별다른 피해는 없었지만 사고 직후 불가사의한 사례가 속출한다. 단순한 전기공급 부실로 인한 문제와는 차원이 다른 사태다.

'말러'와 그의 딸 '안나'는 최근에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귀여운 손자이자 아들 '엘리아스'를 잃었다. 부녀는 원치 않은 이별 때문에 삶의 의욕을 잃어버린 상태다. 그나마 말러는 슬픔 속에도 추스르려 노력하지만, 안나는 살아도 산 게 아닌 모습이다. 허깨비처럼 공허한 눈빛을 한 안나는 직장에 출근해서도 멍한 표정이지만 그래도 사람들과 부대낄 때가 차라리 낫다. 살아갈 의지를 상실한 탓에 혼자 있으면 수시로 자살 충동을 느끼기에 근처에 사는 말러가 조석으로 딸의 집을 방문해 끼니를 챙기고 불상사를 방지하기 위해 고심하는 처지다.

스탠드업 코미디언 '데이빗'은 아내 '에바'와 연애하듯 행복한 결혼생활 중이다. 반항적인 딸 '플로라'은 종종 속을 썩이지만, 아직 어린 아들 '키안'은 그저 천진난만하다. 그런 아들의 생일이 다가오는 터라 부부는 함께 선물을 고민한다. 데이빗은 생업인 공연을 위해, 에바는 아들의 선물을 위해 함께 외출하지만, 에바는 교통사고를 당하고 만다. 공연을 마치고 병원으로 달려온 데이빗은 아내의 시신 앞에서 망연자실한다.

초로의 나이인 '토라'는 반려자 '엘리자베트'의 장례식을 치른다. 너른 식장에는 그와 엘리자베트가 안치된 관 외엔 아무도 없이 쓸쓸할 뿐이다. 이제 혼자가 된 토라는 너른 집에서 고독함을 곱씹어야 한다. 유복한 환경이지만 황혼에 접어든 노부인에게는 아무 의미도 없다.

정전이 지나간 직후, 말러는 느닷없이 밤중에 외출한다. 그가 도착한 장소는 손자가 묻힌 묘지다. 무엇에 홀린 듯 삽으로 관을 파낸 할아버지는 엘리아스가 비록 시체 상태 그대로이지만 숨을 쉬고 있음을 깨닫고 집으로 옮긴다. 데이빗은 병원에서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연락을 받고 급히 도착한다. 토라는 자신 외에 아무도 있을 턱 없는 집에서 누군가의 존재를 확인하고 얼어붙는다. 그들이 최근에 상실한 소중한 이들이 되살아난 것이다. 재회의 기쁨에 벅차지만, 과연 그들의 정체는 무엇일까? 그리고 과연 생전과 같은 인간인 걸까?

고전 공포문학의 원형을 21세기에 되살리는 변주


영국의 소설가 윌리엄 위마크 제이콥스는 1902년, 훗날 그의 대표작이 될 단편소설 '원숭이 손'을 발표한다. 수많은 버전으로 변형된 이 짧은 단편은 공포문학에서 빼놓을 수 없는 '레전드' 반열에 오른 것은 물론, 영문학 단편 중에도 손꼽힐 지명도를 획득한다. 작가는 평생 수많은 작업을 남겼으나 어느 하나도 이 작품에 비견될 수 없었다. 아마 원작은 몰라도 이야기의 기본 원형은 많은 이들이 알 법하다. 이국에서 흘러온 불길한 부적에 3가지 소원을 빌자 아주 기괴하고 끔찍한 방식으로 소원을 이뤄준다는 내용이다.

주인공은 집세를 내기 위해 200파운드를 청한다. 원숭이 손은 알았다는 듯 스스로 움직인다. 직후 외동아들이 일하던 공장에서 기계에 빨려들어 비극적 죽음을 맞는다. 사망 보상금은 200파운드다. 망연자실한 노부부는 장례를 치르고 며칠간 식음을 전폐하다 문득 아직 소원이 남았다는 걸 깨닫고 두 번째로 아들을 돌아오게 해달라 빈다. 손이 다시 움직이고 한밤중에 누군가 문을 두드린다. 하지만 죽은 자, 그것도 형체를 갈기갈기 찢긴 망자를 맞을 공포에 주인공은 아들을 무덤으로 돌려보내 달라는 마지막 소원을 빈다는 이야기다.

이 간결하지만 흡입력 강한 단편은 자체로도 무수한 변주를 낳았지만, 공포문학과 영화에 미친 파급력은 실로 어마어마하다. 대표적으로 현대 미국을 대표하는 대중소설작가 스테판 킹의 소설과 동명의 영화로 유명한 '애완동물 공동묘지' 시리즈를 들 수 있다. 소중한 반려동물을 잃고 시체를 원주민 묘지에 두자 돌아온 걸 본 가족은 죽은 아이를 동일한 방법으로 되살리지만, 돌아온 아이는 생전과 뭔가 다르다.

'원숭이 손'의 후예들은 지난 100여 년 동안 수많은 변형에도 불구하고 원형질의 주제의식은 크게 훼손되지 않고 계승해 왔다. 운명을 인위적으로 거스르려는 시도는 필연적으로 산 자와 죽은 자 모두를 불행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사후세계가 실재한다면 망자는 안식을 누리는 게 당연한 권리인데 산 자의 집착이 초래한 사태의 끝이 행복할 리 없다. 멀게는 그리스 신화에서 오르페우스가 맞이하던 운명처럼, 수천 년 동안 인류가 간직한 일종의 교훈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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