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가 발발하기 전까지 해외여행을 열심히 다녔다. 내가 살던 곳과 너무나 다른 문화와 환경은 잠깐씩 눈을 멀게 했다. 보이는 모든 것이 신기했고 놀라워 하루 10시간 이상을 걸으며 눈으로, 마음으로 담고 또 담았다. 다시 이곳에 못 올 것이(라고 단정했)기 때문에, 지나는 하루하루가 너무도 아까웠고 언제나 마지막 인사처럼 아쉬워했다. 물론 또다시 못갈 것도 없겠지만 우리는 갔던 곳은 여행 계획에 넣지 않았다.
꽤 시간이 지났지만, 아직 여행의 시간은 충분히 남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바라는 모든 것을 하기에는 제약이 많아졌다. 예전보다 동작은 굼뜨고, 더 많이 휴식해야 한다. 무언가를 할 때 시간이 많이 걸리고, 제한해야 할 것도, 여러 경우의 수에 대비할 것도 더 많다. 선택이 신중해야 하는 이유다. 인정하긴 싫지만, 나는 다가오는 노년의 자유(?)로움에 조금씩 적응해 가는 중이라고, 삶은 그런 것이라고 애써 긍정한다.
오늘도 늙어가는 사람들의 이야기
몇 년 전, 오랜만에 만난 친구와 꿈에 대해 말한 적이 있다. 가족들의 근황을 묻다 나온 말이었는데, 친구는 통역의 도움을 받지 않고 자신이 남편의 완벽한 가이드가 되어 일본을 여행하는 것이 꿈이라고 했다. 친구는 그 꿈을 위해 오래 일본어를 공부했는데, 당시도 학원에 가면 자신보다 나이 든 사람은 없다고 했다. 당시만 해도 꿈꾸는 중년이었고, 미소가 당당한 친구의 모습이 보기 좋았다.
최근 개봉한 데미 무어(엘리자베스 역)가 주연한 영화 <서브스턴스>(The Substance, 2024)는 매우 파격적인 설정으로 주목받은 작품이다. 그야말로 과하다 싶게 강렬한 자극을 선사하는데, '어리고 섹시하지 않은' 50대의 나이가 주는 위기의식을 극단적으로 표현한다. 더불어 외적 아름다움에 대한 욕망과 집착은 결국 파멸을 부른다는 것을 보여준다.
"더 나은 나를 원하나요? 그럼 약물을 사용해 보세요."
'더 나은 나', '더 완벽한 나'가 단지 젊음이어야 한다는 설정은 다가오는 '노인'의 삶을 고민하는 사람으로서 무섭고 안타깝다. 게다가 '50대의 나'와 '20대의 나'가 7일마다 교차되는 데, 의식을 공유한 별개의 개체라는 설정은 다분히 또 다른 '나'를 증오할 여지를 남긴다.
뼈를 깎는 아픔을 견디고 신체를 개조해서라도 젊음을 누려보겠다는 유혹은 우리 시대의 강박을 극단적으로 표현하지만, 영화를 보고 나면 늙지 않으려고 발버둥 치는 삶보다는 세월의 흐름을 인정하고 시간을 차곡차곡 잘 쌓자는 생각을 하게 한다. 여러 논란에도 불구하고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는 스스로를 아끼고 사랑할 것, 스스로가 의미 있고 소중한 존재라는 깨달음을 강조하는 것 같다.
날마다 내가 노인인지, 중년인지, 장년인지 헷갈려하고 있다. 아이들이 내 손길을 떠난 지 오래되었으니 부모로서의 효용은 다한 것 같고, 아직은 조금씩이나마 전공과 관련된 일을 하니 노인으로 치부되기는 많이 불편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