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간, 마음 안에 파고드는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의 소용돌이에 아무 말도 아무 움직임도 할 수 없었다. 슬픔, 고통, 분노, 증오 등등 세상의 모든 부정적 단어들이 하나로 합쳐지며 거대한 파장을 일으켰다. 여태껏 딸을 키우며 가장 듣고 싶지 않은 말이 아니었을까. 충격을 애써 누르고 걷던 안양천 길을 멈추고 아내와 벤치에 나란히 앉았다. 눈앞에 보이는 물길도 내 맘 같은지 세차게 흐르는 듯했다.
"왜? 누군데? 언제부터야? 같은 반이야?"
"여보! 하나씩 물어봐. 흥분 좀 가라앉히고 좀."
마음을 차분히 하려 할수록 끓어 올랐다. 이러다간 아무 말도 해주지 않을 것 같아서 입을 꽉 다물고 대신 부들거리는 몸을 붙잡고 눈으로 신호를 보냈다. 폭풍 같은 감정이 누그러지니 아팠다. 바늘로 콕콕 찌른들 이보다 쑤실까.
이제 사귄 지 3일이 되었단다. 상대는 딸이 6학년 때 같은 반이었던 녀석이었다. 사건 경과는 이랬다. 올해 중학교에 올라가서 서로 다른 반이 되었음에도 계속 딸 반에 찾아와 괜히 툭 치고 지나간다든지, 이유 없이 사탕을 주고 가는 등 관심을 표현했단다.
그러면서도 고백은 하지 않고 주변만 뱅뱅 도는 모습에 딸은 냉가슴을 앓았다. 그러다 딸이 먼저 카톡을 보냈고, 우물쭈물하는 모습에 나를 좋아하면 사귀자고 먼저 이야기해서 결국 알겠다는 답을 얻었다고 하는데. 참나. 얼마나 숫기가 없으면 딸이 먼저 고백했을까.
낌새는 있었다. 그때는 착각이려니 하며 대수롭지 않게 지나갔다. 초등학교 졸업 앨범에서 얼굴을 보여주었는데 뽀얗고 잘생긴 모습에서 묘한 질투심이 느껴졌다. 유치하게 왜 그랬는지.
넷플릭스 드라마 <폭싹 속았수다>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을 뽑으라면 단연코 금명(아이유 역)의 결혼식 장면이다. 결혼식장 안으로 들어가기 전 아빠 관식에게 절대 울지 말라며 신신당부하는 금명에게 이렇게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