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이자 비평가인 팔봉 김기진(1903~1985)은 박영희와 더불어 1920년대 후반의 '카프(KAPF) 문학' 기수로 현대 문학사에서 기억되고 있다. 그는 자본주의 체제의 예술이 유희적 장식품으로 전락한 현실을 비판하면서 프롤레타리아와 손잡고 새로운 의식 세계를 지향해야 예술의 본질을 살릴 수 있다고 역설했다.
그랬던 그가 사형선고를 받았다. 카프를 배신하고 친일로 전향한 것이 죄목이 됐다. 그런데 이 사형선고가 나온 곳은 친일청산기구인 국회 반민특위가 아니었다.
한국전쟁 때 이승만 정권은 한강 다리를 끊어놓고 서울을 떠났다. 한강 이북에서 발이 묶인 사람들은 김일성이 좋아서가 아니라 어쩔 수 없이 서울에 남은 시민들이었다. 그런 시민들로 가득한 서울에서 600~700명의 시민들이 인민재판을 열어 김기진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1985년 5월 10일 자 <조선일보> 1면 최하단은 이틀 전에 사망한 김기진을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사람"으로 지칭하면서 "(예전에는) 한국에서 이런 사람을 들 때 김팔봉을 들었다"라고 말한다. 김기진이 한동안 한국판 예수로 거론되던 때가 있었다는 것이다. 그런 다음, 인민군이 서울에 들어온 뒤인 1950년 7월 2일 지금의 서울광장 옆 서울시의회 앞에서 이런 일이 벌어졌다고 말한다.
"당시의 부민관, 지금의 세종문화회관 별관 앞에서 그는 인민재판을 받았다. 카프에서 전향했다는 배신에 사형선고가 내려진 것이다. 돌로 차고 몽둥이로 갈기고 짓밟는 사형(私刑)에 쓰려졌다."
서울 시민들은 그를 새끼줄로 묶어 여기저기 끌고 다녔다. 그런 뒤 남대문 근처에 버리고 가마니로 덮었다. "그러나 다음다음날 그는 깨어났다"라고 위 기사는 말한다. 이 일 때문에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사람"으로 한동안 회자됐던 것이다.
위 인민재판은 친일청산에 대한 남한 민중의 한을 반영한다. 이는 서울을 점령한 인민군의 한이 아니었다. 이 시기 북한에서는 친일청산이 상당 부분 이뤄졌기 때문에, 반민특위가 좌절된 남한처럼 이 문제에 한을 품을 필요가 없었다. 인민군 점령하에서 벌어진 재판이기는 해도, 친일청산과 관련된 이 재판은 남한 민중의 한을 대변했다고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