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까지 알려진 전주형무소 관련 민간인 학살(주1)은 크게 두 가지 사건이다. 첫 번째는 1950년 6월 25일 전쟁 직후 전주형무소에 복역 중이던 좌익 정치사상범 1400여 명이 학살된 것, 두 번째는 1950년 9월 26일 인민군이 퇴각하면서 자행한 전주형무소 수감자 공무원 및 군·경 500여 명이 학살된 사건이다. 전주 황방산 발굴과 발굴지 찾는 데 공로한 분들, 그리고 필자의 눈에 들어온 특이한 점, 김승수 전 전주시장의 노고에 대해 전하고자 한다.
전주형무소 황방산 학살지 발굴 과정
전주형무소 학살 사건은 총 4차례에 걸쳐 진행됐다. 학살 장소는 사람들의 눈을 피해 형무소에서 시내를 거치지 않고 갈 수 있는 동서북 방향의 옛 공동묘지, 건지산, 황방산, 소리개재 등이 선택되었다. 전주유족회는 전주대 박물관 발굴팀과 함께 2019년 시굴작업을 한 결과 세 지점만 발굴 가능한 것으로 파악했다. 2020년 6월경 전주시 완산구 효자동 3가 산195-1번지 황방산 일원에서 1차, 2차 3차 발굴 사업이 이루어졌다(주2). 황방산 일대 학살지를 발굴할 수 있도록 확실한 증언과 자료의 도움을 준 세 분을 먼저 살펴보자.
전주 유족 신종희(78세), 아버지의 기록물을 찾아서
신종희(전주유족회 부회장)씨의 아버지 신계수는 1948년도 당시 24세로 남원지청에서 3년 형을 받고 1년 후 전주교도소에 수감 되었다. 그이후로 소식이 없었는데, 남은 자식들이 연좌제로 걸릴까 우려했는지 큰아버지댁에서 아버지 사망을 자연사로 신고했다. 이 때문에 신종희씨는 아버지가 집에서 돌아가신 줄만 알고 살아왔다고 한다. 그는 40대 후반에서야 아버지의 행방을 찾아야겠다는 결심한다.
전주경찰서와 전주교도소에 방문해 '집행 명부를 열람할 수 없냐'고 문의했지만 거절 당하고 돌아왔다. 다시 백방으로 수소문해도 희망이 보이지 않았다가, 2012년도에 불현듯 '대전 국가기록원'에서 원부를 찾아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단다. 그는 대전 국가기록원에 민원 신청을 했지만, 직원은 자료가 없다는 답변만 전했다.
하는 수 없이 직원에게 '나는 죽을 때까지 아버지 행적기록을 꼭 찾을 것'이라고 엄포를 놓았고, 담당 직원은 본인이 직접 와서 자료실에서 기록지를 찾을 수 있게 허락했다고 한다. 신종희씨는 꼭 찾고야 말겠다는 각오로 광주에서 옷 보따리까지 싸서 대전 국가기록원으로 향했다. 첫날 오전 9시부터 1948년도 자료를 시작으로 훑어보았다. 오후 4시경 삼촌 신인수의 기록이 눈에 들어왔다고 한다. '이게 뭐지?' 너무 기뻐서 마음이 조여들었다고 신종희씨는 그날을 회상했다.
'이번엔 아버지 행적도 곧 나오겠지'라며 설레고 긴장되는 초조한 마음으로 서류함을 뒤적거렸단다. 퇴근 시간쯤, 드디어 아버지 신계수의 원부가 눈에 띄었다. 원부를 보는 순간 숨이 턱 막히는, 기쁘고 반가운 느낌은 평생 잊을 수가 없다고 한다. '내 앞에 아버지가 살아서 돌아온 것처럼, 꿈인 듯, 생시인 듯' 했단다. 그동안 기록이 없다고 한 직원에게 한마디 원망하지 않고 원부를 복사해서 황급히 자료실을 나왔다. 생산년도 1949년 '집행원부, 형사사건부, 수형인 명부' 등이었다.
신종희씨는 전주 지역에서는 최초로 대전 국가기록원에서 아버지의 학살된 기록물을 찾은 유족이었다. 아버지 기록지를 찾고 보니 자신감이 생겼고, 전주 지역 유족들 31명에게 국가기록원에 민원 신청을 권유해 총 18명이 기록물을 찾았다. 그 서류를 대한민국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아래 진화위)에 증거로 제출하여 2024년도 2차 진실규명 결정문을 받게 되었다. 현재 배·보상 민사소송 접수 중인 상태다. 신종희씨의 '아버지의 기록물을 찾겠다'는 일념과 염원에 찬사를 보낸다. 기록물을 찾지 못한 유족들도 있는데, 이는 당시 전주형무소가 미군 폭격으로 전소되어 내부 자료가 거의 남아있지 않기 때문이라고 한다.
양심 증언자(목격자) 이순기 교도관을 찾아서
신종희씨는 아버지 관련 기록물을 찾은 후, 전주에 사는 후배 김종현씨에게 아버지의 사연을 고백했다고 한다. 후배와 신종희씨는 당시 민간인 학살에 관련된 사람들을 백방으로 수소문하고 있었고, 1기 진화위 운영 기간에 이도영 박사와 이순기 교도관의 만남을 어렴풋이 소문으로 알고 있었다고 한다.
2015년쯤 어느날 김종현씨가 이순기를 찾았다는 소식을 듣고, 이순기댁를 찾아갔다. 이순기는 깜짝 놀라면서 '나를 어떻게 알고 찾아왔냐'고 했다고 한다. 신종희씨는 아버지와 연배가 비슷한 이순기를 만나는 순간 아버지를 만난 것처럼 반가웠다고 한다.
이순기는 자신이 목격했던 학살사건의 시간과 장소, 위치 등을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그는 학살 사건 당시 "헌병들이 교도관에게 '쏘고 싶으면 쏴봐'라고 말했지만, 쏠 수가 없었다"고 증언했다. 이순기 교도관은 전쟁이 끝나고 2년 후 혼자 그 학살지를 찾아갔고, 흙을 파보니 유해가 그대로 나왔다고 한다. 하지만 이를 덮어두고 무거운 발길을 옮겼다고 한다. 필자는 이순기 같은 양심적인 증언자가 많이 나오길 기대한다. 대다수의 학살 현장 관련자들은 진실을 감추고 있는 현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