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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년 동안 사라진 약혼자 쫓는 여성, 세계 일주하다 깨달은 건...
2025-03-18 16:13:11
김상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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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영화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때는 1918년 초, 영국의 식민지로 머물던 버마 랑군(현 미얀마 양곤) 부두에 한 백인 남자가 꽃을 든 채 서성거린다. 대영제국의 식민지 행정당국에서 공무원으로 재임 중인 '에드워드'다. 그는 꽃을 든 채 주변을 불안한 눈으로 두리번거린다. 뭔가에 쫓기는 행색이던 그는 공무 수행을 핑계로 항구에서 출항하는 싱가포르행 배에 오른다. 그는 싱가포르에서 태국의 수도 방콕으로 다시 급히 이동한다. 에드워드는 정말 '여왕 폐하의 스파이', 비밀정보기관 요원인 걸까?

에드워드가 버마를 떠나자마자 한 명의 백인 여성이 랑군에 도착한다. 그의 이름은 '몰리', 에드워드의 약혼자다. 두 사람이 결혼을 예정한 지 7년이 지났는데도 차일피일 미루기만 하는 약혼자를 찾아온 것이다. 에드워드는 몰리를 피해 끝없는 도피 행각을 거듭하고, 몰리는 질세라 필사적으로 약혼자를 추격한다. 이만하면 포기할 것이라 믿고 한숨 돌리면 어느새 에드워드가 묵는 숙소로 약혼녀의 전보가 도착한다. 둘 중 하나가 포기해야 끝이 날 판이다.

여행은 덕분에 무한히 연장된다. 서로 간발의 차로 계속 엇갈리며 둘은 서로의 흔적을 확인하고 필사적으로 쫓고 쫓긴다. 버마 랑군에서 출발한 여정은 싱가포르에서 방콕을 지나 베트남 사이공, 일본 오사카, 중국 상하이를 차례로 경유한다. 마침내 백인이라곤 찾기 힘든 양쯔강 상류 오지, 티베트의 접경까지 기이한 추격전은 이어진다. 오직 연인을 찾고자, 혹은 달아나고자. 과연 둘의 장구한 여정은 어떤 결말을 맞이할 것인가?

기묘한 전복과 변주를 감행하다


영화의 제목이자 줄거리를 압축하는 '그랜드 투어', 고급 자동차 이름인 '그란 투리스모'가 본래 어원이다. 처음에는 근세 초입에 유럽 상류층 자제들이 당시 선진 문물로 알려진 프랑스나 이탈리아 등지로 2-3년 동안 장거리 여행을 다니며 견문을 넓히던 유행을 지칭한 단어다. 유럽이 안정을 찾고 번영을 구가하면서 이 장기간 여행 또한 확대를 거듭한다. 서구 열강의 전성기인 19세기 제국주의 시대에는 신비한 동양의 풍광을 쫓아서 여러 대륙을 주유하는 규모로 확장된다. 쥘 베른의 <80일간의 세계 일주>를 떠올리면 쉽게 이해가 될 테다.

포르투갈의 주목받는 작가주의 감독 미겔 고메스의 신작은 바로 그런 '그랜드 투어'를 기묘한 방식을 통해 재구성하고자 한다. <80일간의 세계 일주> 부류의 모험소설에서 벌이는 이 장대한 여정은 대개 인류의 진보와 문명의 개화를 증명하는 도전으로 묘사되곤 한다. 대륙을 넘나드는 여행이 가능할 만큼 교통수단이 확보되고, 강대국에 의한 치안 확보도 가능해진 세계, 거기에 장기간 여행을 감당할 재력과 여유가 확보된 부유하고 교양 있는 여행자의 존재가 이를 가능케 하는 조건이다. 필리어스 포그처럼 노동하지 않고도 몇 개월의 여정을 돈을 뿌려가며 소화할 수 있는 유한계급 신사 모험가들이 이런 '그랜드 투어'에 도전한다.

하지만 <그랜드 투어> 속 주인공들의 여행 동기는 그런 서구중심주의의 대의명분과는 동떨어진다. 에드워드가 벌이는 거대한 여정의 이유는 도무지 이해하기 힘들다. 공직자가 책임의식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건 물론, 약혼자에 대한 도리도 아니다. 그저 일종의 공황 상태로 보일 뿐이다. 그는 명백히 우울증에 빠져 있지만, 딱히 그 원인도 설명되지 않는다. 충동적으로 집요하게 따라붙은 약혼녀를 피하고자 미지의 세계를 파고들 뿐이다. 마치 숨을 수 있다면 더 깊숙한 오지로 파고들려 하는 게 에드워드가 보여주는 유일한 일관성이다.

그런 산만한 동기와 모호한 목적에도 불구하고 에드워드의 낯선 여행은 충분히 흥미로운 광경을 선사한다. 한 세기 전이지만 아득한 과거의 역사처럼 생경한 제국주의 식민지의 풍경이 화면 가득하게 재현되기 때문이다. 당연한 듯 서양 백인들은 상류층을 이루고 동양인을 하인으로 부리거나 시중을 받는다. 여객선 선상 만찬에서 백인 여행자들은 당연하다는 듯 인종차별적 언사를 내뱉고, 자신들이 누리는 풍요의 원천인 식민지에 대해 비하를 주저하지 않는다. 요즘 같으면 당장 발끈해서 멱살 붙들고 시비가 벌어지거나 봉변당하기 딱 좋은 내용이다.

한편으론 자신들의 지식과 세계관으론 이해하지도, 설명할 수도 없는 타국의 문화와 자연에 대해 경외심을 표현하거나 조화를 이루려는 이들도 드물지 않다. '현지화'를 통해 장기적으로 갈등을 줄이고픈 이들도, 동양의 신비에서 영혼의 구원을 추구하는 이들도 곳곳에서 등장한다. (에드워드 역시 불교 사원에서 그런 위안을 찾는다) 하지만 아편에 찌든 영국 영사가 토로하듯, 지금 당장은 번영하며 영속될 듯하지만 '제국의 종말'은 머지않았다. 영화의 시대 배경을 왜 굳이 1918년으로 설정했을까? 서구 열강이 자기들끼리 더 많은 이권을 탐하다 자멸로 향하는 첫 단계, 1차 세계대전의 파국이 끝나가던 시절이다. 감독이 노리고 설정한 게 아니라면 더 이상할 노릇이다.

에드워드의 기이한 모험은 서구의 3세계 침략 초창기 정복자들이 겪던 모순과 겹친다. 베르너 헤어초크의 <아귀레, 신의 분노>에서 황금의 땅 엘도라도를 찾아 아마존 밀림으로 깊숙하게 들어갔던 반란자 아귀레의 파국처럼, 에드워드 역시 식민 지배 말단 일원으로 먼 외국에서 풍족한 물리적 환경에도 불구하고 점점 무너져가는 모습을 반복한다. 그로부터 반세기 후에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가 <지옥의 묵시록>에서 보여준, 전쟁과 제국주의 광기 속에서 자멸하는 커츠 대령과 미군들의 초상을 예언하는 듯하다. 마침 코폴라 영화의 원작인 조지프 콘래드 소설 <암흑의 핵심> 배경도 <그랜드 투어>와 그리 멀지 않은 시기다.

같은 여행이지만 행위자 따라 재해석되는 변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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