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 최초 만화책은 가물가물하지만, 어릴 적 친구와 교실에 봤던 만화책은 단연코 기억난다. 눈이 반쯤 감긴 꺼벙이, 주근깨 만발의 뚱딴지, 잔뜩 입이 나온 채 울상을 짓는 우야꼬 등이 그려진 만화일기 시리즈. 1990년대에 초등학생이었다면 익숙할 이 만화책들은 대교출판에서 발행된 밀리언셀러였다. 지금의 3040에게 추억으로 통한다.
세월을 거슬러 올라 1970년대, 만화는 6대 사회악으로 규정된 바 있다. 밀수, 탈세, 마약과 같은 취급을 당했다. 어른들은 불건전한 도서로 '만화'를 거론했고, 어린이들에게 만화를 불태우게 하는 만화 화형식까지 벌일 정도로 추방운동에 극성이었다. 그 시대 여파를 고스란히 이어받아서인지 만화는 왠지 숨어 보는 비밀스러운 책이 되었다. 만화로선 억울한 일이겠다.
명랑만화 캐릭터가 가득 실린 만화일기만큼은 달랐다. 우선 '순한맛'이라 학급문고에도 많았다. 천진하고 엉뚱해 보이는 캐릭터들이 집과 학교를 오가며 벌어지는 에피소드는 실제 어린이들 생활과 닮아 있었다. TV 광고에도 나올 만큼 인기가 대단했는데, 지금의 학습만화 시리즈 'Why' '마법천자문'과 비슷하달까. 모든 게 명랑만화의 유산이었다.
우리 유년 명랑하게 지켜준, 한 시대 풍미한 만화가들
한국 명랑만화의 기원은 어디일까. 명랑만화는 1960년대, 검열과 통제가 일상다반사로 일어나던 군사정권 시대에 탄생했다. 출판사들은 어린이 교양지 창간 뒤 경쟁적으로 판매 부수를 올리기 위해 부록으로 만화책을 내걸었고, 명랑만화 인기는 점점 고공 행진했다.
'교양지' 명목으로 심의에서 벗어나는 대신, 지면에 실린 명랑만화들은 건전한 내용과 이미지들이 주를 이뤘다. 만화가들은 그 틈에서도 독자적인 창작법과 서사를 만들어냈다. 칸에 갇히지 않고 행동의 연속성을 표현하거나 독특한 만화 기호도 고안해냈다. <명랑만화를 보러갔다>(2025년 2월 발간) 저자 박성환은 숱한 자료 조사 끝에 그 시절을 소환한다. 때론 원시시대로 우주로 상상의 나래를 펴게 해준 명랑만화가들에 대한 헌사를 이 책에 담았다.
1960년대는 보릿고개로 굶는 일이 있을 만큼 어려운 시절이었다. 논밭으로 공장으로 일하러 부모가 집을 비우면 어린이들은 만화방에서 시간을 때웠다. 저자는 삐걱대는 나무 출입문을 여닫으며 이모의 만화방에서 만화를 섭렵해갔다. 그는 만화가가 되었고, 현실에선 하기 힘든 모험을 맘껏 떠나게 해준 선배들, 즉 명랑만화 캐릭터들의 창조주 여덟 명을 페이지마다 불러 모았다.
그렇게 이 책에 소환된 여덟 명랑만화가는 다음과 같다. <꺼벙이>의 길창덕, <맹꽁이서당>의 윤승운, <로봇 찌빠>의 신문수, <고인돌>의 박수동, <심술통>의 이정문, <우야꼬>의 윤준환, <아기공룡 둘리>의 김수정, <멍텅구리 특공대>의 손상헌. 명랑만화라는 한 시대를 풍미했던 만화가들의 삶을 칸마다 구성했다. 만화가의 삶을 만화로 다뤄 더욱 감칠맛 난다.
묘하게 페이지를 아껴 읽게 된다. "우리는 모두 명랑만화를 보며 꿈을 꾸던 어린 시절의 귀여운 기억 한 페이지를 간직한 사람들"이라는 저자의 말에 공감이 가서 허투루 넘길 수 없다. 독자 역시 추억의 한 장을 펼치게 된다. 당시 어린이잡지의 양대산맥이라 불렸던 <어깨동무>, <소년중앙>, <새소년>에 만화를 연재했던 작가들의 에피소드 또한 박진감 넘친다.
그들의 작품을 앞다퉈 실었던 잡지사 사람들, 사제지간 무용담, 만화가들이 친목을 다졌던 모임 '심수회' 등 어깨너머로 만화가 화실을 살피는 재미가 쏠쏠하다. 그 시절 만화로 먹고산 사람들 이야기가 추억이란 멍에를 벗고 생생하게 재현된다.
천진하고 정 많은 만화 캐릭터들
솔직히 말하면, 1980년대 후반에 태어난 나는 저자가 소개한 작가 모두를 알지는 못한다. 명랑만화 쇠퇴기 무렵 태어났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모와 삼촌이 펼치던 만화책, 책받침, 어른들이 쌓아놓은 정기간행물에 실린 명랑만화를 본 기억이 어슴푸레 존재한다.
저자는 그 희미한 기억에 색을 입힌다. 제대로 알지 못했던 명랑만화 캐릭터들의 계보를 알려줘 국내 만화사를 보는 눈을 키운다. 그래서 이 책은 국내 만화의 역사를 알고 싶거나 만화가를 꿈꾸는 어린이, 청소년과 함께 봐도 좋겠다. 스마트폰이 익숙한 세대에게, 우리 만화가 웹툰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걸 소개할 수 있는 통로가 생긴 것 같아 기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