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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성 촉석루 의기사에서 만난 역사
2025-05-02 09:05:18
김병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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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어디를 가나 꽃들이 절정이다. 방 구석에 틀어박혀 있기엔 너무 아깝다. 지난 주말, 들꽃도 볼 겸 누구나 반겨주는 행복 동행에 주저할 이유가 없었다. 갈 길이 멀어 이른 아침부터 종종 걸음이다. 진주 행이다. 진주성 촉석루에 이르려 주변 따라 걷다 보면 의기사(義妓祠)가 눈에 띈다.


의기사는 촉석루 앞 의암(義巖)에서 적장(敵將)을 껴안고 남강으로 투신한 논개(1571~1593) 사당이다. 의기사로 가는 길목엔 동백꽃이 논개 입술 되어 피어있는 듯 유난히 붉다. 꽃보다 아름다운 의기(義妓) 논개가 위풍당당한 모습으로 일행을 반긴다.

1593년 6월, 진주성 2차 전투가 막바지에 이르자 진주성 총사령관 격인 황진 장군이 성 밖 상황을 점검하다 왜군 총탄에 맞았다는 비보가 성 안으로 퍼진다. 졸지에 지휘 장군을 잃은 진주성의 조선군은 전세가 급속도로 약화 되고 설상가상으로 북문과 동문이 무너진다.

그 틈을 노린 왜군들이 파죽지세로 밀고 들어오자 후일을 도모하자는 부하들 제안을 뿌리친 창의사 김천일 장군(1537~1593)은 아들과 함께 남강으로 뛰어들고 최경회 장군(1532~1593)도 뒤따른다.

남편 최경회 장군이 남강으로 몸을 던지자 전북 장수 출신으로 알려진 논개는 스스로 관기(官妓)가 되어 적장을 촉석루 연회장 밖 의암(義巖)으로 유인한다. 분노한 논개는 적장을 껴안고 남강으로 투신한다. 그녀는 장군의 여인으로 끝까지 적장을 노린 것이다.

역사는 그녀를 의기(義妓)라 하고, 투신했던 바위를 의암(義巖)이라 한다. 조선 조정은 촉석루 옆 의기사(義妓祠)를 세우고 그녀의 의로움을 역사에 남긴다. 조선 후기 다산 정약용(1762~1836)도 논개 사당을 보수하는 중수기를 짓고, 매천 황현(1855~1910) 역시 논개의 의기(義妓)를 시(詩)에 담아 새긴다.

발걸음을 멈추고 논개 사당을 물끄러미 바라보는데 산홍(山紅)의 시(詩)가 눈에 띈다. 그녀는 진주 관기로서 경남도 관찰사 이지용(1870~1928)이 첩이 돼 줄 것을 종용하자 단호히 친일 매국노의 첩이 될 수 없다고 하면서 '의기사감음(義妓祠感吟)' 시(詩)를 남기고 역사 속으로 사라진다.

의기사감음(義妓祠感吟)
- 산홍

천추분진의(千秋汾晉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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