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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주독립 의열사 열전] 을사늑약반대 음독자결한 조병세
2024-11-24 18:18:25
김삼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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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병세(趙秉世, 1827~1905)는 경기도 가평에서 아버지 유순과 어머니 대구서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자는 치현((穉顯), 호는 산재(山齋), 시호는 충정(忠正)이다. 아버지는 현감이었다.

32세에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고 사간원 정선·헌납·홍문관 교서 등을 지냈다.

37세에 <철종실록> 편찬에 참여하고, 이후에 사헌부 장령, 부교리, 사간원 사감, 홍문관 부응교에 이어 39세에 이천부사·영광군수 등 외직인 지방관을 지내고, 40세에 대사성·의주부윤·대사헌 등 요직을 두루 역임하였다. 41세에 한성부판윤·우의정, 46세에 좌의정을 지냈다.

1894년 동학농민혁명, 청일전쟁, 갑오개혁 등이 일어나자 정계를 떠나 고향으로 은퇴하였다. 동학농민혁명을 진압하고자 조정에서 청국군을 끌어들이려하자 이에 우려를 표하고, 1896년 폐정개혁을 위한 <시무 19조>를 상소하였다.

일제의 범권과 민비 살해 등 국권침탈, 이에 대해 의병봉기 등 시국수습책이었다. 주요 내용은 언로를 크게 열어 중지를 모을 것. 유능한 인재를 널리 구할 것, 재정의 충실과 군대 양성, 의병을 호유하되 토벌하지는 말 것, 아관파천 이후 러시아에 대한 신중한 외교 정책 등이 담겼다.

고종이 1898년 정승(영의정)에 임명 했으나 받지 않았다. 1900년에 다시 궁궐에 들어가 임금에게 국정개혁을 건의하고 포천으로 돌아왔다. 고종은 무능한 군주였다. 사태가 점점 악화되어가고 일제의 야욕이 들어났는데도 친일파들에 쌓여서 위기감을 느끼지 못한 것이다. 조병세는 1905년 2월 서울에 주재하전 외국공관이 빠져나가는 등 국가의 위기가 코앞이 닥치고 있음을 지켜보고 <시폐 5조>의 상소를 올렸다.

1. 재상을 신중히 선택하여 관기를 바로 세울 것.
2. 황실주변의 간신배를 숙청하여 아첨배를 배제할 것.
3. 간관을 두어 언로를 넓힐 것.
4. 외부대신을 잘 선택하여 대외교업에 많은 기할 것.
5. 탐관오리를 징치하여 민심을 안정시킬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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