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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운 외갓집
2025-01-30 15:23:56
정은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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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 산자락 아래 아늑한 작은 도시. 그곳은 내 어린 시절의 추억 보물창고다. 내가 사랑하던 외갓집이 있던 구레 산동. 지금은 개발이 되어 사라져 버린 연초록색 기와집 외갓집을 떠올려본다. 다시 가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나와 동생들은 방학 때만 되면 외갓집을 향했다. 거의 온 방학을 그곳에서 보내다시피 하다가 개학날이 다 되어서야 집으로 돌아오곤 했다. 그래서인지 나의 방학 추억은 온통 외갓집에서 만들어졌다. 보통 한 달 동안 외갓집에 머물렀다.

사실 그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나는 남동생이 태어남과 동시에 외가에 보내져서 지냈다. 내 기억 속엔 없지만 셋째 이모가 나를 업어서 딸처럼 키워주셨다고 했다. 큰 이모는 일찍 결혼을 해서 서울에 살고 계셨지만 셋째와 막내 이모는 외가에서 학교를 다니는 학생들이셨기에. 그래서일까? 나는 어려서부터 지금까지 이모들이 엄마처럼 따스하고 좋다. 막내이모는 결혼해서 서울로 가기 전까지 외가에 살았으니, 꼬꼬마 시절 이모들은 엄마를 대신했다.

직행 버스를 타고 외가에 가면 커다란 느티나무 곁의 산동면 시내의 큰 길가 버스정류장에서 내렸다. 큰 도로를 사이에 두고 가게와 관공서가 줄줄이 늘어져있는 번잡한 시내 뒤쪽 동네에 외갓집이 있었다. 버스정류장 뒤로 연결된 작은 도로를 따라 내려가다 보면 뾰족한 산동교회가 보였고, 그 옆으로는 산동중학교가 있었다. 외갓집은 바로 그 아래에 있었다.

한 번은 겨울방학 때 막내이모가 우리를 데리러 오신 적이 있었다. 그때는 눈이 많이 내려서 버스대신 구레까지 기차로 가서 버스를 갈아타고 산동으로 갈 계획이었다. 하지만 우리가 구레역에 내렸을 때는 폭설로 인해 버스가 운행을 하지 않는다는 소식을 접하고 말았다. 어쩔 수 없이 우리는 이모의 손을 붙잡고 외갓집까지 눈길을 걸어서 갔던 기억이 있다.

오랜 세월이 흘렀는데도 그날 우리가 걸었던 그 하얀 눈길을 잊으려 해도 잊히지 않는다. 심지어 나는 가끔 꿈속에서 눈보라를 헤치며 그 길을 걷기도 한다. 멀고도 먼 길을 그저 이모 손만 붙잡고 다리를 끌며 걸어갔던 그 겨울을, 외갓집에 도착하여 보드라운 비단 이불이 깔린 따끈따끈한 아랫목에 들어가 몸을 녹이던 그 날을 잊지 못한다.

골목길에서 외갓집이 보이면 달음박질하여 헐떡이며 작은 뒷문을 지나 초록색 대문을 향했다. 대문을 들어서면 깔끔한 화장실이 두 칸 나란이 있었고, 하얀 디딤돌이 중앙에 길을 내어 여러 개의 유리문으로 만들어진 외갓집 현관 앞 길다란 뚤방까지 연결했다.

하얀 길 양편으로는 작은 꽃밭이 가꾸어져 있었고, 오른쪽 꽃밭 끝으로는 수돗가와 장독대가 있었다. 뚤방 아래는 단단한 흙마당이 우리가 뛰어놀 수 있는 공간을 내주었다.

생각해 보니 그 시절 외갓집이 꽤나 세련되고 멋스러우며 신경 써서 잘 지은 집이란 걸 알게 되었다. 누구보다도 깔끔하고 정갈하신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의 보살핌 아래 우리는 많이 놀고, 먹고, 웃으며, 배웠다.

마당에서 유리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오면 신발을 벗어두는 길다란 문지방에서 다리를 올려 커다랗고 넓은 마루로 올랐다. 명절에는 외가의 큰 마루에 교자상 여러 개를 펼쳐 음식을 가득 차려서 온 식구가 삥 둘러앉아 만찬은 나누었다. 외할머니의 음식솜씨는 아무도 따라 갈 수 없을 정도로 소문난 요리가셨다. 지금도 엄마는 외할머니를 못 따라가신다고 안타까워하는데, 나 또한 엄마의 솜씨를 못 따라가니 점점 세대를 따라 그 음식솜씨가 실력을 잃어가는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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