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란 와이셔츠에 물방울무늬 넥타이를 맨 두 남성이 각자 몰고 온 마을버스를 능숙하게 차고지에 댔다. 하얀 장갑을 낀 채 내린 이들은 먼 길 오느라 고생했다며 악수를 청했다. 조재환(69)·조윤호(52) 씨를 만난 곳은 통영시 한산면사무소 인근 버스 차고지. 지난해 세상을 떠난 고 조재일(향년 82세) 씨 이야기를 듣기 위해서다. 고인은 재환 씨 형이자 윤호 씨 아버지다. 한산도에 버스를 처음 들여온 사람이기도 하다. 고인의 삶은 '파란만장'했다.
개척자가 돼야 했던 소년 = 조재일 씨는 1942년 한산도 야소마을에서 태어났다. 한산도 지명 대다수가 그렇듯 야소마을도 이순신 장군과 연관이 깊다. 임진왜란 당시 각종 병장기를 생산하던 대장간이 있던 곳으로, 한자 야(冶)는 풀무라는 뜻이다. 그래서일까 조 씨는 어려서부터 손재주가 좋았다.
머구리(잠수를 전문으로 하는 남성)였던 아버지를 따라 물질도 곧잘 했다. 손재주가 그의 생계가 된 것은 아버지 별세 직후다. 조 씨 아버지는 물질을 해서 해산물을 부산에 내다 팔았다. 그날도 작업을 마치고 부산으로 이동 중이었다. 평소보다 더 많은 해산물을 실은 배는 파도를 이기지 못하고 뒤집혔다. 조 씨는 이 사고로 아버지를 비롯한 친척들을 한꺼번에 잃었다. 아버지 나이 40대 초반, 조 씨는 고작 17살이었다.
평범했던 조 씨네 가족은 아버지 죽음으로 풍비박산 났다. 얼마 없던 재산은 보상금 명목으로 아버지 배에 탔던 이들 가족에게 돌아갔다. 어머니는 당장 삼남매 생계를 홀로 책임져야 했다. 맏이 조 씨도 생계에 뛰어들었다.
안 해본 일이 없었다. 목수부터 양봉업, 보일러 수리업, 양계업, 블록 시멘트 생산업까지 여러 사업에 뛰어들었다. 조 씨는 한산도에 없는 직종을 골랐다. 조 씨 동생 재환 씨는 14살 위 형의 듬직한 파트너였다.
"형님이 사업을 같이 해보자고 제안하더라고요. 섬이다 보니까 육지보다 불편하기도 하고 없는 게 많거든요. 형님은 항상 그런 것들을 먼저 발견했어요. 거기다가 워낙 손재주가 좋으니까 자기가 직접 하려고 했지요."
여러 사업을 전전한 끝에 발붙인 일은 버스 사업이다. 1989년 당시 45인승 버스 한 대를 섬으로 가져왔다. 그해 10월 행정에서 허가가 떨어지기 전까지 무상으로 운행했다.
"형님은 항상 섬에 무언가를 남기려고 했어요. 섬에 버스도 차도 없다 보니 다들 불편해했거든요. 육지 문명을 가져와야겠다고 생각하지 않았나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