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 수 없는 이유로 인간이 사라진 세상, '고양이'는 주인 없는 집에서 혼자 살아간다. 비인간 동물들의 세계는 목가적 자연과는 거리가 멀다. 인간은 비록 사라졌지만, 먹이사슬이 작동하는 가운데 고양이는 생계를 알아서 해결함은 물론, 경쟁자들로부터 스스로 지켜야만 한다. 고달픈 하루를 보내던 어느 날, 천지를 뒤흔드는 대홍수가 돌발적으로 발생한다. 처음엔 그저 높은 곳에 올라 피하면 될 듯했지만, 물은 점점 차오르고 고양이가 거처로 삼던 집도 잠기기 시작한다. 지금껏 겪지 못한 재해라는 걸 깨달은 고양이는 필사적으로 피난처를 찾는다.
멀리서 낡은 배 한 척이 다가오는 것을 본 고양이는 급히 올라탄다. 당장 가라앉을 위기는 면했지만, 앞날은 도무지 예측할 수 없다. 막막한 가운데 배는 정처 없는 표류를 시작한다. 그런데 대홍수로 보금자리를 잃은 건 고양이뿐만이 아니다. 대홍수의 생존자들이 하나둘 낡은 배의 승객이 된다. 고양이와 먹이를 놓고 경쟁하며 내몰던 들개 무리의 일원이던 '골든 리트리버', 붙임성 좋기로 유명한 '카피바라', 반짝이는 물건을 수집하는 '여우원숭이'가 차례로 일행에 합류한다. 여기에 잡아먹힐 위기에 처한 고양이를 구해준 '뱀잡이수리'까지 일행이 된다.
물론 서로 다른 종의 비인간 동물들이 단지 생존을 위해 올라탄 배에서 원활한 관계가 처음부터 확립될 리 없다. 먹이를 놓고 경쟁하거나 배를 안전하게 몰기 위해 힘을 합쳐야 할 때 딴청을 부리는 이기적 면모 때문에 이들은 충돌을 거듭한다. 수위는 점점 차올라 마른 땅을 찾기란 도무지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이들의 여정은 과연 안식을 찾을 수 있을까?
경이로운 작가주의 애니메이션
실사 영화로는 구현할 수 없는 표현의 경지를 위해 애니메이션 장르는 오래전부터 독자적 행보를 거듭하며 발전해 왔다. 만화영화에 관한 기성세대의 선입견이라면, 한창 학업에 전념해야 할 청소년들이 한눈을 팔도록 만드는 유해 매체, 좋게 봐줘도 아이들 시간 메우기 딱 좋은 오락물에 불과했다. 그런 부당한 오해를 오랫동안 받았고 현재도 여전히 그런 잔상은 남아있다. 하지만 일찍이 애니메이션의 미학적 실천에 주목한 작가들은 주목할 만한 예술적 성취를 쌓아 올려 왔다.
자급자족하거나 공공기관의 지원에 힘입어 소수 작가들은 주류 상업 애니메이션과는 별개의 견고한 영역을 고수하며 역작을 남겼다. 식목일만 되면 단골로 소환되는 프레데릭 벡의 <나무를 심은 사람>이나 인류 진화에 대한 철학적 성찰이 담긴 르네 랄루의 <판타스틱 플래닛>, 인간이 아닌 존재들의 시선으로 본 재개발 문제를 다룬 브루노 보제토의 <알레그로 논 트로포> 등이 대표적인 아트 애니메이션 '마스터피스'들이다. 대개 개인 혹은 소규모 그룹으로 몇 년에 걸쳐 '한 땀 한 땀' 이태리 장인처럼 원화를 그리는 고행을 감당하며 세상에 선보인 작업들이다.
이게 보통 고생길이 아니다. 24프레임, 즉 1초에 24장을 후다닥 돌려야 '활동사진'의 기본 조건이 충족되니 5분짜리라도 7200장을 그려야 한다. 이게 만약 1시간 넘는 장편이라면 가뿐히 10만 장을 초과하는 셈이다. 붓이나 연필, 크레파스로 일일이 수작업한다 생각해보라. 이만한 예술적 정성은 흔치 않다. 같은 애니메이션이라 해도 '애들 보는' 상업 애니메이션의 공장제 시스템과는 전혀 다른 개념이다.
그런 2D '셀' 애니메이션 장인들은 디지털 환경 변화와 함께 차츰 사라져 갔다. 그 자리를 현란한 컴퓨터 그래픽과 게임 구동 엔진을 동원한 3D 영상이 채워나갔다. 그렇게 작업 환경과 방식은 변했지만, 새로운 기술을 활용하며 작가주의 애니메이션의 명맥을 잇는 이들은 여전히 존재한다. 그런 작업 사례는 거액의 자금과 대규모 인력이 투입된 스튜디오 블록버스터와 다른 감각으로 소수 애호가를 사로잡는다. 종종 그중 세계적인 주목을 받는 경우도 생기는데, 라트비아 출신 긴츠 질발로디스 감독의 2번째 장편 <플로우>는 근래 가장 대표적 사례일 테다.
놀라운 건 85분 분량의 장편 애니메이션을 음악 등 일부 협업을 제외하면 거의 전체 작업을 감독 개인이 감당했다는 점이다. 물론 지난 세기의 장인들처럼 손수 원화를 그려야 했다면 거의 불가능한 도전이다. 21세기 작법에 걸맞게 감독은 3D 컴퓨터 그래픽 제작 오픈소스 소프트웨어 '블렌더'를 활용해 본 작품을 완성할 수 있었다. 일정한 기술 발전, 그리고 자유로운 접근성이 새로운 세기의 애니메이터들에게 기회를 제공한 셈이다. 결정적으로 상업 자본에 덜 구애받아가며 작가의 비전을 최대한 구현한 작업은 시간 죽이기 용도가 아닌 예술적 감흥에 오롯이 바쳐진다. 작품의 경이로움은 극장에 도착한 관객의 오감을 끝날 때까지 사로잡고 놓아주지 않는다.
비인간 동물들의 '방주' 전설
등장 비인간 동물들은 대홍수를 벗어나기 위해 힘을 합쳐 서로 도와야만 한다. 하지만 재난 이전엔 나 몰라라 하거나 심지어 적대하던 존재들이 하루아침에 협력하기란 요원하다. 그나마 사회화 과정을 거친 인간조차 이기적 면모를 위기 상황에서 민낯으로 드러내기 일쑤인데, 애초 생태계 차원에서 종과 종 사이 분업은 있을지언정, 개별 개체 간에 대화나 협조 개념은 부재하니 큰일이 아닐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