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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파'로 오해했는데... 이런 사람 또 없습니다
2025-04-19 15:39:53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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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와 인터넷에서 다양한 그룹과 계급이 일상적으로 의견을 교환하며 사회를 움직인다. 이런 공간이 없거나 덜 발달했던 19세기와 20세기에는 그런 에너지가 학교에서 많이 분출됐다. 귀족 교육이 아닌 대중교육이 발달한 이 시기에는 매일 같이 학교에 모이는 청소년과 청년들이 부모의 직업과 계급에 덜 구애받으며 사회 전체를 위한 목소리를 쏟아냈다.

20세기 한국 역사를 움직인 3·1운동, 6·10만세운동, 4·19혁명, 6월항쟁 등에서는 학생들이 운동의 주력부대가 됐다. 유럽에서는 이 현상이 다소 빨랐다. 한국 세계평화교수협의회가 1985년에 발행한 <광장> 제140호에 '세계의 학생운동과 정치참여'를 기고한 마틴 립셋 스탠퍼드대 교수는 "정치에 있어서 학생들이 차지하는 중요성과 학생행동주의(student activism)에 대한 관심은 이미 19세기 중반부터 시작되었다"라며 이렇게 기술한다.

"1848년의 독일과 오스트리아에서의 혁명은 학생들의 주도에 의한 것이었으며, 학생들의 행동주의는 교수의회를 자극하여 여러 군주국가에 위협을 주기도 하였다. 러시아제국에서는 학생들이 여러 차례에 걸쳐 혁명운동의 선봉에 나섰으며, 대학의 캠퍼스는 혁명의 중심이었다."

한국에서는 1919년 2·8독립선언이 학생행동주의의 신호탄이 됐다. 이 사건은 3·1운동을 비롯해 그 이후 학생운동의 정신적 지주가 됐다. 약 600명의 재일 유학생이 참여한 가운데 최팔용·서춘·송계백과 최근우 등이 주도한 이 사건은 3·1운동에도 직접적 영향을 끼쳤다.

왜 최근우는 독립유공자가 되지 못했나


국가보훈부가 발간한 <독립운동사 제8권: 문화투쟁사>는 천도교 지도자인 의암 손병희가 제1차 세계대전 종전과 고종의 사망으로 조성된 국내외 정세를 관찰하면서 독립운동을 추진하던 중에 일어난 일을 이렇게 소개한다.

"이때에 동경 유학생들의 독립선언 거사 계획이 1월 중순경 귀국한 송계백에 의하여 정식으로 알려지게 되었는데, 그는 선배인 현상윤을 찾아가 일본 유학생의 독립선언 계획을 자세히 설명하고, 모자 속에 감추어온 독립선언서를 보이고 거사 날짜를 2월 상순으로 정했음을 알렸다. 현상윤은 최린에게 선언문을 보냈으며, 이것은 동경 유학생의 거사 계획과 함께 의암에게까지 들어가게 되었다. 의암은 이 소식을 듣고 독립운동계획의 적극 추진을 명하였다. 그 자리에 있었던 권동진·오세창·최린 등은 추진 중인 민족거사 계획을 3월 초에는 실현할 수 있도록 다짐하였다."

도쿄 유학생들의 선구적 모습은 2·8독립선언서에서도 확인된다. 선언서 내의 결의문 제4항은 "전항(前項)의 요구가 실패할 시는 오족(吾族)은 일본에 대하여 영원의 혈전을 선(宣)함"이라며 "차(此)로써 생하는 참화는 오족이 그 책(責)에 임(任)치 아니함"이라고 선언했다. 일본이 독립을 방해하면 영원한 혈전을 벌이겠다며 이로써 생기는 피해는 우리가 책임지지 않으니 알아서 하라는 선전포고였다. 3·1독립선언서에는 없는 내용이다.

2·8독립선언서에 동의한 약 600명은 대담했다. 서너 명도 아닌 그 정도의 인원이 한국도 아닌 일본 수도에서 혈전을 선포하는 것은 미치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2025년 이 시국에 백악관 앞에 가서 '인권을 보호하지 않으면 영원의 혈전을 벌이겠다'고 선포하는 것 이상의 용기와 신념이 필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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