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퀴어-체육계 관행, 숙련된 솜씨로 사회적 금기를 버무리다
2024-10-18 17:31:44
김상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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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을 천천히 또박또박 소리내어 읽어본다. '우/리/는/천/국/에/갈/순/없/지/만/사/랑/은/할/수/있/겠/지' 19글자다. 제목은 짧고 간결하게 짓는 게 철칙이다. 특히 수많은 동종 경쟁자들이 경합하는 문화예술 콘텐츠에서 자극적이고 흡입력 있는 제목은 모든 홍보의 첫 순위가 된다. 자연히 갈수록 짧아지거나 기상천외하게 관심을 끌고자 방망이 깎듯 심혈을 기울이게 마련이다.

그런데 대체 이리 긴 제목은 무슨 의도에서일까?

제목만으로 전체 이야기가 한눈에 파악되는 건 물론, 그 주제까지 상상하게 만드는 것이다. <우리는 천국에 갈 순 없지만 사랑은 할 수 있겠지> (이하 <우·천·사>)의 제목은 조나단 스위프트나 대니얼 디포의 작명론을 따른다. 영화 속 주인공들이 튀어나오듯 건네던 대사는 곧 그들을 기다리는 운명과 맞서는 의지로 형상화된다. 그래서 수많은 갈등 속에도 제작진은 제목을 수정하지 못했을 테다. 그 검증은 영화를 보면 알 수 있는 일이다.

1999년 여름 어느 날, 소녀가 사랑에 빠지다


1999년 여름 어느 날, 세상은 지구 종말 예언과 밀레니엄 Y2K 대란이라는 혼란 속에도 가쁘게 돌아가는 중이다. '주영'은 태권도부원으로 절친한 친구 '성희'와 함께 전국대회를 앞두고 훈련에 매진한다. 성희는 국가대표를 꿈꿀 정도로 주변 기대를 한몸에 받고 주영은 그 옆에서 손해 보는 것도 많지만, 둘의 우정에는 별문제가 없다. 하지만 성희와 겹치는 체급 때문에 주영은 급하게 한 체급을 올려야만 하는 상황이다.

며칠 사이 5KG 증량하라는 코치의 억지 요구에 주영은 햄버거를 흡입하지만, 꼭 이럴 때는 살이 찌지 않게 마련. 때는 아직 전근대적 관행이 팽배하던 20세기 말이다. 코치의 터무니없는 지시를 완수하지 못하면 가혹한 연대책임이 뒤따른다. 연예인 지망생 소꿉친구 '민우'와 함께 오늘도 햄버거를 잔뜩 주문하는 주영에게 민우가 부탁을 전한다. 한눈에 반한 햄버거 가게 아르바이트 '예지'에게 고백 쪽지 전달이다. 주영은 청을 수락한다.

귀갓길에 그는 자기 대신 학대를 당한 주장과 부원들에게 집단 폭행을 당한다. 학교폭력 상처가 있는 이들에겐 섬찟한 장면이 아닐 수 없다. 어디선가 사이렌이 울리고 놀란 부원들은 황급히 자리를 뜬다. 하지만 현장에 나타난 건 사은품 장난감 경찰차 사이렌을 작동한 예지다. 사회복지직에 근무하는 주영의 엄마는 소년원 청소년 사회화 프로그램으로 한 달간 가정체험을 전한다. 대상은 놀랍게도 동갑내기 예지였다. 둘은 한 방에서 생활한다. '나의 구원자' 예지에게 주영이 느끼는 감정은 미묘하고 가슴은 떨린다.

자신을 지키라고 권한 태권도 때문에 스트레스가 심한 딸을 보다 못한 주영의 엄마는 친구들과 우정 여행을 제안한다. 예지의 이모가 있는 익산으로 주영과 예지에 성희와 민우, 네 친구가 함께 나선다. 그곳에서 일상과 떨어진 주말 동안 주영은 자신이 품던 감정을 조심스레 확인한다. 가혹한 고3 시절 안팎으로 잔인한 상황에 내몰리던 주영에게 구원의 동아줄과도 같다.

하지만 세상은 주영과 예지의 관계를 색안경을 끼고 바라본다. 지금껏 이해자로 주영을 바라보던 이들의 태도가 바뀌고, 그저 질풍노도의 시기 찰나의 연민에 불과하다는 단정이 붙는다. 주영은 확신에 차 소중한 이들을 지키려 한다. 하지만 운명이 그들을 시샘하듯 주영과 친구들에게 위기가 잇달아 닥친다.

숙련된 솜씨로 사회적 금기를 버무리는 이 영화의 승부수


<우·천·사>는 근래 한국 독립영화 주요 소재를 구성하는 요소들의 집합체다.

① RETRO, 즉 복고 감성이 충만한 배경: 1999년 밀레니엄 시절
② 성소수자 주인공에게 찾아온 금단의 사랑: 퀴어 로맨스
③ 한국 사회의 집단주의와 폭력적 관행: 체육계 비리와 성추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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