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 6월 25일 원태근(元泰根) 지사가 세상을 떠났다. 1882년 3월 4일 경기도 과천군 하서면(현 안양시 안양동)에서 출생했으니 향년 68세였다. 지사는 흔히 원태우(元泰祐)로 알려져 있는데, 국가보훈부 독립유공자 공훈록에는 '성명 원태근, 이명 원태우(元泰祐), 김태근(金泰根), 김태우(金泰祐)'로 소개되어 있다.
소개문 첫머리에서 두 가지 궁금증을 느낀다. 첫째는, 1950년 6월 25일에 타계하셨으면 이 분은 전사자인 듯한데 어째서 독립유공자로 등재되어 있을까 하는 점이다. 합리적 의심이라 할 만하다. 하지만 원 지사의 타계일 6월 25일은 우연의 일치일 뿐 전사는 아니고 그냥 자연사이다.
유명 독립지사들, 동지 보호 위해 수많은 이명 사용
두 번째는, 본명이 원태근이고 원태우, 김태근, 김태우 등 이명이 여럿 있는 것이 의열단 창립 주역 이종암(李鍾巖) 지사가 이종암(李鍾岩), 이종순(李鍾淳), 양건호(梁健浩), 양건호(梁建浩), 양달호(梁達浩), 권택건(權宅建), 이집중(李集中), 양주평(梁洲平), 양근호(梁根浩), 양주평(梁朱平) 등 수많은 이명을 사용한 것과 같은 의미의 일인가 하는 점이다.
결론을 먼저 말하면 '아니다'이다. 이종암 지사는 다른 독립지사들에게조차 신분을 드러내지 않고 거사를 추진해야 할 일이 많은 까닭에 불가피하게 많은 이명을 사용했다. 거사 중 불행하게도 누군가가 피체되었을 때 그렇게 이명만 알려져 있어야 다른 동지들을 보호할 수 있기 때문이다.
원태근 지사는 그런 경우가 아니다. 비격진천뢰 발명으로 경주읍성 탈환 전투를 성공시켜 임진왜란 전세에 큰 전환점을 만들어낸 이장손의 사례와 같다. 이장손은 크나 큰 업적을 이루었지만 언제 태어나 언제 죽었는지도 확인되지 않는다.
이름 이장손(李長孫)도 그렇다. 어느 이씨 집안의 '장손'이라는 이야기다. 즉 이장손은 성명 그 자체가 아니다. 신분사회에서 미천한 집안 출신이라는 이유로 대단한 공을 세웠는데도 '이름도 몰라요, 성도 몰라' 수준으로 역사에 기록되고 있는 것이다.
원태근 지사도 돌을 깎아 무엇인가를 만드는 석공이었다. 을사늑약 체결 뒤 수원으로 유람여행 온 이토 히로부미의 얼굴을 돌로 쳐 피투성이를 만든 의거로 피체되어 고문을 당했다. 송상도 <기려수필>을 읽어본다.
안중근은 이토 히로부미를 죽였고 김태근(원태근)은 이토 히로부미를 죽이지 못했으니 안중근과 김태근 중 누가 더 낫다고 할 수 있을까? 성공 여부로 보면 안중근이 김태근보다 더 훌륭한 것 같다. 그러나 나는 이토 히로부미가 비록 안중근의 총탄에 죽었지만 그 조짐은 이미 김태근이 던진 돌에서 비롯한 것이라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