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동그란 원을 그리고 있었다. 책상 위에 놓인 흰색 A4 종이 위엔 어느새 다양한 모양의 원들이 그려졌다. 그는 최근 여론조사 등을 들어가며 "국민들이 지금 가장 원하는 것이 (경제)성장과 통합"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통합을 말하면서, 하나씩 '원'을 그리고 있었다. 이어 "지속가능한 성장은 통합 없이는 불가능하다"면서 "지금 같은 극심한 정치적 분열과 사회적 갈등을 치유하고 통합할 수 있는 방안을 만들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유종일 전 한국개발연구원(KDI) 국제정책대학원장(명예교수). 서울대 경제학과와 미국 하버드대를 나온 엘리트 경제학자지만, 성향은 진보적이다. 오래전부터 시장만능주의에 비판적 입장을 견지하면서 재벌개혁과 경제 민주주의에 앞장서 왔다. 이명박 정부시절에는 이라는 책을 통해 정부 주도의 무리한 고환율 정책과 자원외교, 4대강 사업 등을 비판했다. 또 사회적 빈곤과 양극화 문제에도 관심을 가졌고, 사회적 금융 '주빌리은행'을 맡아 저소득층의 빚 탕감 운동을 이끌기도 했다.
지난 15일 오후 서울 여의도에 위치한 사무실에서 그와 마주앉았다. 방 한 칸의 조그마한 사무실이 분주해 보였다. 기자와 이야기를 나누기 전까지 유 전 교수와 관계자 등이 회의를 하고 있었다. 다음날 (16일) 국회에서 열리는 '성장과통합' 출범행사를 위한 막바지 준비 작업이었다. 오랜만에 그와 마주 앉았지만, 특유의 어법은 그대로였다. 경제 현상과 정책을 설명하면서 적절한 비유와 예시를 드는 것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웃으면서 "작년 11월 KDI에서 나와 조용히 은퇴자의 삶을 준비하고 있었다"면서 "12월에 생각지도 못한 일이 벌어졌고 다시 일을 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그가 요즘 '성장'을 말한다. 물론 보수에서 말하는 경쟁과 효율만을 따지는 '성장 지상주의'와는 다르다. 인공지능(AI)을 통한 글로벌 산업 대전환기 속에 정부가 앞장서 전략적인 산업정책을 내놓고, 기업과 학교 등과 새로운 생태계를 만들겠다는 게 그의 구상이다. 그는 "기업가적 정부"라고 이름을 붙였다.
그리고 '345 성장론'을 꺼내 들었다. 차기 정부 임기중에 경제 잠재성장률을 3%까지 끌어올리고, 4대 수출 강국과 1인당 국민소득 5만 달러를 이루겠다는 것. 과거 MB정부의 747정책(7% 성장과 4만달러, 7위권 경제대국)을 강하게 비판해왔던 것을 의식한듯, 그는 "747정책은 당시 상황에 맞지 않은 무모한 정책이었다"고 했다. 이어 "최근 10년새 우리 성장 동력 자체가 급속하게 꺼지고 있는 상황"이라며 "성장 동력을 살리기 위한 정부 차원의 전략적인 정책과 민간기업, 국민 등이 참여하는 국가 프로젝트를 추진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그의 '성장론'은 '성장과통합'이라는 정책 연구모임을 통해 구체화되고 있다. 유 전 교수는 허민 전 전남대 부총장(지구환경과학부)과 함께 공동대표를 맡았다. 그는 "지난 12.3 내란과 트럼프발 관세 전쟁 등으로 제2의 경제위기 상황"이라며 "경제를 살리고 국민 통합을 위한 해법과 정책 과제를 준비하는 네트워크형 정책 집단"이라고 '성장과통합'을 소개했다. 이어 "경제 성장 전략을 중심으로 시작해서 기후위기 대응 뿐 아니라 복지 등 다양한 분야에서 정책 대안을 고민하게 될 것"이라며 "진보와 보수 가릴 것 없이 누구나 쓸 수 있도록 하겠다"고 했다.
"비상계엄 후 더 충격... 이재명 전 대표가 직접 '성장전략' 의견 구해"
- 윤석열 정부가 2년 6개월 만에 막을 내렸다. 지난해 12월 비상계엄과 내란, 탄핵에 이르기까지의 시간들을 뒤돌아본다면.
"윤석열 정부를 (돌아)보면 참으로 상식을 뛰어넘는 해괴망측한 일들이 많았던 것 같다. 그래도 계엄령까지는 '설마' 했다. 당시 TV 중계화면을 보면서 놀라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시민들과 계엄군의 태도를 보고 속으론 '계엄이 실패하겠구나'라고 생각했다. 사실 문제는 그 이후였다."
- 어떤 면에서 그런가.
"알다시피 국회 탄핵안이 통과된 이후에도 여당인 국민의힘이 내란을 옹호하고, 윤석열을 지지하는 세력들이 대거 광장에서 목소리를 높이고 실제 여론에 영향을 미치고... 서부지법 폭동사태까지 보면 이건 파시즘에 이르는 단계인데, 이런 모습을 보고 더 충격을 받았다."
- 사실 헌법재판소의 탄핵선고에 이르기까지 많은 국민들이 불안했던 것도 사실이다.
"(고개를 끄덕이며) 상상의 범위를 뛰어 넘었다. 극우 진영의 가짜뉴스에 현혹돼 생각보다 많은 국민들이 그쪽 논리에 동조하고, (국회 탄핵이후) 시간이 흐를수록 진짜 위기감이 들었고 스스로 자괴감이 들 정도였다. 과거 전태일 열사, 518 광주민주화운동 시절도 생각났고, 무엇인가 해야할 일을 고민할 때 마침 이재명 전 대표로부터 연락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