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니메이션으로 처리된 드라마 <폭싹 속았수다>의 오프닝 타이틀을 보면 영화팬들에겐 익숙한 이름이 보인다. 박찬욱, 봉준호, 류승완, 최동훈 등 2000년대 한국영화 부흥기를 이끈 중견 감독들의 세계를 시각적으로 구현해 낸 류성희 미술 감독이다. 그리고 류성희 감독의 아트 디렉터로 일해온 최지혜 미술 감독의 이름도 함께 표기돼 있다. 이 드라마가 최지혜 감독에겐 '미술 감독' 데뷔작이기도 했다.
강렬한 이미지의 장르 영화에 주로 참여했던 두 사람이 광례, 애순, 금명 등 3대에 걸친 여성의 대서사시를, 그리고 약 60년에 걸친 제주와 서울의 변천사를 구현해냈다. 600억 원 대의 예산이 들어간 16부작 드라마에서 두 사람의 미술이 차지하는 비중은 절대적이었다. 경상북도 안동에 마련된 제주 어촌 마을 세트장, 경기도 연천 부지에 마련된 시장 거리 풍경은 시청자들의 마음을 울리기 위한 기본 조건이었다. 이밖에도 서울 종로, 합천, 광주 등에서 조합해낸 '깐느극장'은 금명(아이유)과 충섭(김선호)의 애틋한 사랑이 피어나기에 충분했고, 각종 소품이나 벽지 하나하나도 두 감독의 보이지 않는 노력이 깃든 결과물이었다.
넷플릭스 측에서 두 사람의 서면 인터뷰를 공개한 직후인 지난 10일 서울 서대문구에 위치한 최지혜, 류성희 미술감독의 작업실에서 그들을 직접 만날 수 있었다. 작품 공개 직후 여러차례 기자가 요청한 끝에 이뤄진 만남이다. 고심하던 류성희 감독이 최지혜 감독의 데뷔를 꼭 알리고 싶다며 어렵게 수락했음을 미리 밝힌다.
대본에 묘사된 사계절, 그 자체로 펼쳐진 상상의 나래
<피도 눈물도 없이>를 시작으로 <올드보이> <살인의 추억> <암살> 최근의 <헤어질 결심>과 <외계인 1,2> 등. 대표적인 한국영화로 입지전적 업력을 쌓아온 류성희 감독은 <폭싹 속았수다>로 주변 사람들에게 가장 많은 연락을 받았다고 한다. "19금 작품이거나 호불호가 강한 작품을 해오다가 이렇게 보편적인 작품에 참여하다 보니 그런 것 같다"며 류성희 감독이 웃어 보였다.
"많은 분들이 두루 좋아해주신 작품에 참여하니 또다른 충만감이 든다. 제가 극중 금명이랑 동갑이다. 숫자로는 쓰지 말아주시라(웃음). 드라마에 담긴 노태우 6.29 선언, IMF 등이 제 삶에도 너무도 큰 영향을 미쳤다. 개인의 삶이 사회적, 정치적 이슈와 무관하지 않은 시대를 살았는데 물론 드라마를 보신 어떤 분들은 너무 정치적인 면을 희석했다고 비판하기도 하지만, 아마 그 시기를 거쳐온 분들이 이 작품에서 본인의 삶을 떠올렸을 것이다. 저도 대본을 읽으며 주마등처럼 막 스쳐 가더라.
제 경험이 드라마 속 묘사와 같아서라기보단 봄 여름 가을 겨울로 나눈 서사 구조 덕에 읽었을 때 감정이 더 증폭된 것 같다. 애순이와 관식의 파란만장한 혹은 무모했던 이야기들을 계절에 비유하니 누구라도 편하게 자기 인생을 몰입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제가 보통은 시나리오를 읽을 때 개인적 상상을 많이 안 하려 한다. 첫 관객으로 보는 것이라 보편적 감정을 읽어야 디자인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근데 <폭싹>은 많이 상상했고 몰입하게 되더라." (류성희 감독)
"일단 전 너무 감개무량하다. 드라마 자체가 너무 좋았고, 김원석 감독님 연출로 시나리오를 봤을 때보다 더욱 생생해진 게 있어 좋기도 했는데 류성희 감독님 옆에 나란히 제 이름을 올린다는 것 자체가 감격이었다. 제 사수시고, 막내일 때부터 10여 년간 함께 일해온 분이니까. 제가 상업 영화로는 < 미쓰GO >(2012)가 첫 작품이었고, <반창꼬>(2012), <숨바꼭질>(2013)을 한 뒤 <국제시장>(2014)에서 류 감독님을 처음 뵙게 됐다. 그 뒤로 <암살> <아가씨> <외계인> 등을 같이 하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