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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속 가죽이 벗겨진 판사...지귀연 판사가 떠올랐다
2025-05-06 17:38:44
이명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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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널 좀 돌려요. 저 사람 얼굴만 보면 속이 뒤집혀요."

평소보다 낮고 단호한 아내의 목소리. 그 말투엔 12·3 비상계엄 사태 이후, 불면과 악몽 속에서 몸부림쳤던 시간이 묻어 있었다. 아내뿐만 아니라, 특정 인물만 봐도 극심한 스트레스를 호소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넉 달간 이어진 거리 시위와 온라인 공간을 뒤덮은 언어는 날이 갈수록 격해졌다. 정치적 혼란, 산불, 경기 침체, 각종 사건사고가 피드를 잠식했고, 사람들은 무의식적으로 그 불안에 빠져들었다. 손가락은 멈추지 않고 화면을 넘긴다. 이른바 '둠스크롤링(doomscrolling)'. 고통을 되새김질하며 일상은 서서히 마모된다.


그날의 계엄 실패는 기적이었다. 헬기는 지연되었고, 시민들은 탱크 앞에 몸을 던졌으며, 국회의원들은 담을 넘어 국회로 들어갔다. 민주화를 학습한 일부 군인들은 명령을 망설였고, 이 모든 장면은 생중계되었다. 대통령이 군을 동원해 국민에게 총을 겨누고, 국회의원을 끌어내라고 지시했다는 사실은, 지금 떠올려도 등골이 서늘하다.

계엄이 하루만 더 이어졌다면, 우리는 또 다른 1980년 광주의 악몽을 목도했을지도 모른다. 계엄 해제 방송을 보며 나는 연신 "하느님이 보우하사"를 되뇌었다. 이 모든 사태가 끝난 뒤, 나는 상식적 심판과 빠른 정상화를 기대했다. 그러나 현실은 기대를 조롱하듯 상식 바깥의 일들로 가득했다. 계엄 찬성 집회, 법원 습격, 민심 분열. 체포된 내란 수괴 윤석열은 궤변을 늘어놓으며 국민의 울증을 악화시켰다.

그리고 충격적인 뉴스. 윤석열 전 대통령이 서울구치소에서 석방되었다. 이유는 '구속 기간을 시(時) 단위로 계산했다'는 전례 없는 논리였다. 본인이 공저자로 참여한 법학서에서조차 '일' 단위 계산을 명시했던 판사가, 이해할 수 없는 판결을 내렸다.

윤 전 대통령의 석방을 결정한 지귀연 판사는 단숨에 국민적 공분의 중심에 섰다. 내란 혐의 재판에서도 그는 석연치 않은 편의를 제공하며 사법 불신을 더욱 깊게 만들었다. 한 시민단체가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에 그를 고발했고, 유시민 작가는 기명 칼럼에서 '마법의 산수'로 윤석열을 풀어줬다며 그를 정조준했다.

"나는 민주공화국의 주권자로서, 그리고 내 몫의 의무를 다하는 납세자로서, 위법 판결을 하고 국민의 알 권리를 무시하는 지귀연 판사를 징계하고 싶다. 나는 기회가 생길 때마다 그의 이름을 거론할 것이다."

나도 그 글에 깊이 공감했다. 지귀연 판사가 누구의 지시를 받았든, 혹은 독단적 판단이었든, 그 결과는 법의 권위를 저버렸다. 지금 내 심정은, 바위를 향해 촛불을 드는 것 같은 무력감이다. 그러나 이조차 하지 않으면 더는 버틸 수 없을 것 같다.

법은 누구의 편에 서 있는가

"이게 재판입니까? 개판이지."

영화 <부러진 화살>의 대사가 자꾸 떠오른다. 실화를 바탕으로 한 이 영화는 법이 정의를 외면할 수 있다는 냉혹한 진실을 고발한다. 판결은 진실보다 권력과 조직 논리에 따라 움직이며, 개인의 목소리는 왜곡되거나 삭제된다.

사법부는 오랫동안 불공정한 판결과 권위주의로 국민의 신뢰를 배반해왔다. 죄가 있어도 돈이 많으면 무죄, 죄가 없어도 가난하면 유죄라는 인식은 단순한 편견이 아니다. 간첩 조작 사건, 강기훈 유서 대필 사건은 국가가 국민에게 허위의 죄를 덮어씌운 인권 유린의 상징이었다. 반면, 재벌이나 권력자의 범죄는 늘 솜방망이 처벌로 끝났다.

판사들은 '제 식구 감싸기' 문화에 안주하며 판결 오류 앞에서도 책임을 지지 않는다. 지금의 '정의'는 사건의 크기가 아니라, 그 사건 앞에 선 이가 누구냐에 따라 결정되는 듯하다. 법정은 더 이상 정의를 실현하는 공간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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