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조 원에 달하는 더불어민주당의 2025년도 예산 감액안은 윤석열을 어지간히 분노하게 만들었던 모양이다. '비상계엄 거사일'이 민주당이 감액예산안을 제출한 이틀 뒤였다는 점, 윤석열이 담화로 직접 밝힌 비상계엄의 주요 명분 중 하나가 민주당의 예산 삭감이었다는 점에서 그렇다.
비상계엄은 조세재정의 역사에도 상흔을 남길 초유의 일이었다. 윤석열의 이러한 '견문발검(見蚊拔劍)'은 응당 그 대가를 치르겠지만, 이는 미치광이의 칼부림 이상의 중요한 의미가 있다. 그것은 예산에서의 '행정부 절대 우위 시대의 종언'이라는 차원에서다.
감액 대부분은 예비비와 국고채 이자
여러 차례 팩트체크된 내용이니 간단히 짚고 넘어가겠다. 민주당 감액예산안에 대한 윤석열의 분노는 대부분 오해와 왜곡으로 점철되어 있어 일일이 반박하기조차 민망한 내용이다.
삭감한 4.1조 원이 큰돈으로 보이긴 해도 정부 편성 기준 총지출 677조 원의 0.6%에 지나지 않는다. 국회 심의 과정에서 5~7조 원 수준의 예산 조정이 이루어진다는 점을 감안할 때 협상 과정에서 야당의 4.1조 원 삭감 요구는 전혀 무리한 것이 아니다. 그런 일을 열심히 하라고 헌법이 국회에 예산심의권을 부여한 것이다.
규모로 따지면 통상적으로 이뤄지는 정부의 예산 구조조정이 훨씬 무자비하다. 지난해만 하더라도 정부는 50조 원 이상 지출이 조정된 예산안을 제출했다. 기재부가 매년 지출구조조정의 성과라고 밝히고 있는 지출 규모만 하더라도 25조 원 안팎이다. 여기에 국회의 4.1조 원 감액안은 명함도 못 내밀 수준이다. 국회는 오히려 더 분발해야 한다.
이 4.1조 원 감액 중 60%에 육박하는 2.4조 원은 예비비 감액분이다. 예비비는 정부 재량으로 사용할 수 있는 돈이라 남용 논란이 지속적으로 제기되어 왔다. 윤석열은 12일 담화문에서 민주당이 재해 대책 예비비를 1조 원 삭감했다고 힐난했지만, 재난 대응 긴급 예산은 추가경정예산(추경)으로 편성해 집행하면 되는 일이다. 용산 대통령실 이전과 해외 순방에 불투명하게 동원된 수백억 원 예비비에 대한 해명부터 내놓아야 할 일이었다. 투명한 예산 집행과 임의 지출 축소를 위해 예비비의 축소는 바람직한 방향성이다.
다음이 국고채 이자상환액 5000억 원 삭감이다. 이 예산은 소위 '약속 대련' 예산으로 예비비와 함께 언제나 과대 편성되는 것으로 익히 알려져 있는 항목이다. 기획재정부는 국고채 예상 이자율을 과대 산정해 지출을 부풀린 후 국회의 다른 사업 예산 증액 요구에 지렛대로 활용한다. 정부는 못 이기는 척 지출을 깎고 그만큼 국회 요구 예산을 반영해 준다. 이 과정에서 정부의 다른 예산사업들은 삭감 위협에서 벗어나게 되는 것이다. 그럼에도 매년 5000억 원 안팎의 불용액이 나오는 게 현실이니, 국회 입장에서는 대폭 삭감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특수활동비(특활비) 삭감을 마약 범죄 수사 방해로 호도하는 인식도 놀랍다. 천억 원에 달하는 특활비는 이미 정부 예산안의 암적 존재로서 재정에 대한 국민들의 불신을 불러오는 대표 항목으로 수술이 불가피하다. 마약 수사할 돈으로 부하들 관리하고 떡값을 나눠주니 문제가 아닌가. 진작에 개혁되었어야 할 항목이었다. 집권할 때는 방치하다가 이제 와서 칼을 휘두르는 민주당의 모습이 그리 아름다워 보이지는 않지만 어쨌건 특활비 삭감은 사필귀정이다. 개혁을 하려면 전모를 밝혀야 하는데 정부가 집행내역과 증빙자료조차 못 보여 준다고 버티면서 예산만 달라고 한다면 국회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