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11월 말, 9년 넘게 다녔던 직장을 관뒀다. 월급은 적은 편이지만 참고 계속 다니면 어느 정도 정년을 보장해 주는 회사였다. IMF보다 더하다는 불경기, 평균 수명까지 늘어나 가급적 오래 일해야 먹고살 수 있는 삶. 정년퇴직까지 버텨도 모자랄 판에 나는 그 모든 걸 포기하고 회사를 나와버렸다.
사직서를 내면서 후회나 아쉬움은 없었다. 오히려 홀가분했다. 당시 내 마음은 엉켜버린 실타래 같았고, 치워도 도통 끝이 보이지 않는 어지럽혀진 방 같기도 했다. 풀 수도 비워낼 수도 없었다. 잘라내고 방을 옮기는 거 말고는 방법이 보이지 않았다.
퇴사를 실행한 건 작년이었지만 고민은 수년 전부터 해왔다. 스트레스는 늘 한계치를 넘나들고 있었다. '이정도는 모두가 다 안고 사는 게 아닐까' 생각하면서 버텼다.
심리 문제로 나타난 선택적 섭식 장애
버팀을 포기하고 관둘 결심할 수 있었던 계기는 몸에 탈이 나서였다. 3년 전에 감기약을 먹기 위해 물을 한 모금 마셨는데 삼키지 못하고 뱉어버렸다. 다시 시도했지만 똑같았다. 그 뒤 물을 삼키는 것이 무척 어려워졌다. 물컵을 보면 꿀꺽 넘기지 못할 것 같은 공포감이 나를 사로잡았다.
물뿐만이 아니다. 모든 액체류 삼키는 것에 불편함을 느꼈다. 그 쉬운 일이 되지 않으니 삶의 질이 무척 떨어졌다. 점점 우울해졌다. 물을 마실 때마다 불안감은 더욱 커졌다.
어떻게든 물을 조금이라도 더 마시려고 별 짓을 다했다. 빨대를 이용해 조금씩 삼키는 연습을 했다. 아예 숟가락으로 물을 떠 먹어보기도 했다. 심지어 어린아이들이 물 마시기 연습하기 위해 나온 어린이 물병을 사서 들고 다녔다. 어린아이도 의식하지 않고, 해낼 수 있는 삼킴을 하지 못하게 되다니. 그런 내가 이해도 안 되었고 받아들이기도 어려웠다.
천만 다행히도 밥을 먹는 데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오직 액체류만 식도가 거부했다. 증상이 생기고 한참 후에야 알게 되었다. 이 증상이 우울증과 불안증 때문이라는 것을.
돌이켜 보니 퇴사를 하기로 결심했던 작년의 그날은 별로 다르지 않은 보통의 하루였다. 평소 당하던 부당한 대우가 똑같이 반복되었지만, 더 심하게 당한 날은 아니었다. 같은 부서 동료들에게 집단 따돌림 비슷한 것을 당했지만 그것도 어느 정도 적응한 상태였다. 그러다 작년 봄, 일하는 사람들과의 관계가 틀어진 사건이 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