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인애국단원 이봉창(李奉昌) 의사는 1932년 1월 8일 오전 11시 44분경, 일왕 히로히토가 만주국 괴뢰황제 부의(溥儀)와 도쿄 요요기(代代木) 연병장에서 관병식을 거행하고 경시청 앞을 지날 때 수류탄을 던졌다.
이봉창은 일왕이 두 번째 마차에 탓을 것으로 짐작하고 폭탄을 던졌으나 일왕은 폭사하지 않았다. 수류탄의 성능이 별로 좋지 않았던 것이다.
국치 22년 만에 대한제국 병탄의 수괴인 일왕을 적의 수도 왕궁 근처에서 폭살하고자 한 대담한 의거는 비록 실패하기는 했으나 한민족으로서는 대단한 쾌거가 아닐 수 없었다.
국내는 물론 만주·중국·러시아에서 각종 의열투쟁이 전개되어 혁혁한 전공을 세웠으나 적도 한복판에서 일왕에게 폭탄을 던진 것은 이봉창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1923년 박열이 일왕 부자를 폭살시키려는 거사를 일본에서 준비하다가 검거되어 미수에 그치고 말았다.
이봉창 의거는 비록 적중하지는 못하였으나 그 파장은 만만치 않았다. 본인은 일제 법정에서 사형선고를 받아 순국하고, 일제의 식민통치는 더욱 악랄해졌다. 뿐만 아니라 이 사건을 '불행부중(不幸不中)' 즉 불행히 적중시키지 못하였다라는 중국의 신문보도를 트집잡아 상하이를 침공했으며, 같은 한인애국단원 윤봉길에 의해 일왕 생일 및 상하이전승기념 축하회장에서 폭탄세례를 받아야 했다.
이봉창은 1901년 8월 10일 서울 용산구 원효로에서 태어나 천도교에서 세운 문창학교에 입학하여 4년 과정을 수료했으나 집이 가난하여 진학을 포기하고 일본인이 경영하는 과자점 점원이 되었다. 이후 용산역의 용원으로 채용되어 역부 노릇을 하다가 1925년 일본 오사카로 건너갔다.
오사카에서 막노동을 하다가 제대로 먹지 못해 각기병에 걸려 치료를 받고 다시 노동으로 생계를 유지하였다. 1928년 11월 교토에서 거행된 일왕 히로히토의 즉위식을 구경갔다가 일경에 끌려가 유치장에서 고초를 겪기도 했다.
이봉창은 일본에서 철공소 직원으로 근무할 때 그 성실성에 감동된 주인의 양자로 들어가 이름을 기노시타(木下昌藏)로 바꾼 뒤 도쿄 등지를 다니면서 노동으로 생계를 꾸렸다. 이어서 일본인 비누공장 점원, 해산물 도매상, 요리점 종업원 등을 전전하다가 29세 때인 1930년 12월 일본 선박을 타고 상하이로 망명하였다.
조선인이 차별받고 착취당하는 것은 일제에 주권을 빼앗겼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독립운동을 하고자 신문에서 보았던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있는 상하이로 갔다. 이봉창은 뒷날 재판을 받으면서 상하이로 가게 된 이유를 밝혔다.